[노트북을 열며] 감청 불감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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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정신과 신체가 멀쩡한데 병역을 면제받거나 현역 이외의 방법으로 병역의무를 마치는 젊은이가 적지 않다. 이들의 부모 가운데 상당수가 권력가나 재력가라는 점은 관심거리다. 또 20여년 동안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지병이 신체검사를 받으면서 밝혀지는 것도 흥미롭다.

박노항 원사의 병무비리 사건 수사결과에 대해 많은 국민들이 수긍하지 않는 것은 아직 우리 주변에서 이같은 경우를 쉽게 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3년여 동안 끌어오던 병무비리 사건이 마무리 수순을 밟고 있다. 수사당국은 기소 후에도 수사를 계속하겠다고 다짐하지만 실질적인 수사는 사실상 마무리됐고 법원의 판결만 남겨놓은 상태다.

국민들은 주범인 朴원사가 체포되면 이 사건의 실체가 상당 부분 모습을 드러낼 것으로 기대했다. 이른바 '박노항 리스트' 와 엄청난 배후세력 등이 공개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러나 이 사건 역시 몸통 대신 깃털만이 허공에 나부끼다 국민들의 뇌리에서 사라질 듯하다. 하긴 대형 비리.의혹사건치고 국민들의 지지와 박수 속에 수사가 마무리 된 기억이 거의 없으니 당연하다는 생각마저 든다.

이 사건 수사과정을 지켜보면서 이같은 수사결과보다 더욱 답답한 부분이 있어 화가 치밀고 섬뜩한 느낌도 갖게된다. '감청(監聽) 불감증' 때문이다.

수사당국은 수사과정에서 사용했던 다양한 기법과 내용 등을 자세하게 공개했다. 朴원사 주변인물들에 대한 2년여의 감청과 미행, 朴원사가 은거하던 아파트의 가스미터기 움직임 점검, 아파트 문앞에서 없어진 신문 추적 등등.

수사과정에 외압이나 직무유기 등이 없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고육책이 아닌가 추측은 해본다. 하지만 감청사실을 자랑하듯이 당당하게 공개해도 되는 것인지에 생각이 미치면 어안이 벙벙해진다.

감청의 근거가 되는 통신비밀보호법은 인권침해 소지를 최소화하고 사생활을 보호하기 위해 제정됐다. 감청으로 엄청난 인권침해가 있었고 그 폐해도 형언할 수 없을 정도라는 판단에서다.

따라서 이 법률은 방법과 대상, 목적, 기간 등을 아주 까다롭게 규정해 극히 제한적으로 감청이 이뤄지도록 하고 있다. 사회적 관심을 끄는 사건에 대해 언론이 감청사실을 알았더라도 이를 보도하면 처벌을 받을 정도다.

朴원사 주변인물 수십.수백명에 대한 감청이 이같은 법적 절차와 규정에 따라 적법하게 이뤄졌는지에 관심이 모아지는 이유다. 또 다른 사건에서도 이번처럼 감청이 당연하고 거침없이 사용되는 것은 아닌지 궁금해진다.

무분별한 사생활 파괴와 인권침해가 우려되기 때문이다.

요즈음 적지 않은 정치인이나 고위 공직자, 수사기관 종사자 등은 소속 기관의 것이 아닌 개인 소유 휴대폰을 가지고 다닌다. 수신용과 발신용이 따로 있는 경우는 물론이고 소유자가 엉뚱한 경우까지 있다.

이들과 통화를 하다가 내용이 '일정 수위' 를 넘게 되면 "감이 좋지 않은데 다시 통화하자" 는 말을 자주 듣게된다. 기술적으로 감청이 어려운 휴대전화를 사용하자는 신호다.

고위 공직자나 언론사 전화는 감청된다는 말인지 정확한 의미는 알 길이 없지만 '감청 공포증' 이 널리 퍼져 있는 것은 사실이다.

남의 통화내용을 몰래 엿듣는 것이 수사기관으로서는 '감청(監聽)' 인지 모르겠지만 영문도 모르고 당하는 입장에서는 엄연한 '도청(盜聽)' 이다. 감청은 자랑이나 공개의 대상이 아니라 반드시 사라져야 할 반인권적 수사기법 또는 정보수집 수단일 뿐이다.

김우석 전국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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