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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의 명인] 유기장 김근수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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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7면

얼굴 표정까지 고스란히 비치는 영롱한 표면, 급조된 일회용 생활용품에서는 느낄 수 없는 묵직한 중량감. 게다가 보온 효과까지 뛰어나 대접.주발(밥그릇).양푼 등으로 애용됐던 선조들의 필수적인 부엌 살림이 '놋그릇' , 즉 유기(鍮器)다.

시원한 사기 반상기(飯床器.밥상 하나를 차리는 한 벌의 그릇)가 여름철 밥상을 장식했다면 아침 저녁으로 찬바람이 불 무렵부터 겨울철 밥상의 주연은 단연 노르스름한 광채가 일품인 유기 반상기였다.

구리(銅)를 주재료로, 섞는 성분에 따라 청동(구리+주석).황동(구리+아연).백동(구리+니켈) 등 다양한 합금이 가능했던 유기의 쓰임새는 그릇, 수저 등 식기류에만 한정되지 않았다.

대야.요강.담배함.촛대 일반 생활용품에서 연적.서진(書鎭) 따위 문방구, 제사 때 쓰는 제기(祭器), 절에서 필요한 불구(佛具)와 징.꽹과리.나팔.편종 등 악기까지 유기가 쓰이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였다.

조선 영조 때 실학자 유득공(柳得恭)이 쓴 『경도잡지(京都雜誌)』에는 "통속적으로 놋그릇을 중요시하여 사람들은 반드시 밥.국.나물.고기까지 일체의 음식을 담는 용기로 놋그릇을 사용한다. 심지어 요강.세숫대야까지 놋쇠로 만든다" 고 기록돼 있을 만큼 유기의 인기는 대중적이었다.

전국적인 수요를 감당했던 수많은 '유기 브랜드' 중 조선조 말 최상품은 단연 경기도 안성에서 생산된 '맞춤 유기' .

제작 기법이 정교해 당시 양반들이 선호하던 작고 아담한 그릇을 만드는데 적합할 뿐 아니라 합금 기술이 뛰어나 견고하고 광채가 우수했다. '안성맞춤' 이란 말이 '생각이나 요구에 딱 들어맞는 물건' 을 비유하는 일반 명사가 된 것도 이 때부터다.

1983년 중요무형문화재 77호로 지정된 유기장(鍮器匠) 김근수(金根洙.85.경기도 안성시 봉남동)옹은 플라스틱.스테인리스 스틸 그릇에 밀려 한때 사라질 위기에 처했던 안성 유기의 명맥을 십수년 전부터 홀로 잇고 있다.

안성에 남아있는 유일한 유기 공장을 운영하는 金옹이 밝힌 제작 과정의 가장 큰 특징은 주물 방식이다. "안성 유기는 돌이나 진흙.개펄흙 등으로 만든 암.수 거푸집에 쇳물 상태의 구리 합금을 부어서 찍어내는 방식" 이라는 것이다.

요즘은 기력이 달려 공장 운영에 전념하고 가끔씩 주물 작업이 진행되는 부질간을 둘러볼 뿐이라는 金옹은 즉석 제작 시연(試演)에서 토틀이라고 불리는 쇠틀 안에 만들려는 그릇 형태의 번기(番器)를 얹고 개펄흙을 채워 다졌다.

번기를 들어내자 암 거푸집이 완성됐고 같은 방식으로 수 거푸집을 만든 후 미리 뚫어놓은 무집(쇳물 길)을 통해 쇳물을 부었다. 색깔이 거무튀튀하고 표면이 거칠던 유기는 깎아 다듬는 '가질작업' 을 거쳐 기왓가루로 윤을 내자 말끔한 속내가 드러났다.

金옹이 경험한 안성 유기의 최전성기는 해방 직후였다. 대야.요강.밥그릇.수저 등 안성산이 여성들의 필수 혼수품이 되면서 밀려드는 주문을 따라가기 힘들 정도였다. 전국 각지의 장사꾼들이 안성에서 며칠씩 묶으며 유기가 완성되기를 기다렸다가 받아가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6.25가 끝나고 새로운 재질의 그릇들이 쏟아져 나오며 급속하게 사양길에 접어들었고 75년에는 주수입원이었던 수출길마저 막히면서 공장이 부도나기도 했다.

"유기 제작을 포기하고 싶었던 순간이 한두번이 아니었지만 위기를 이겨내고 안성 주물 유기의 명맥을 잇게 돼 다행" 이라는 金옹은 요즘 희망에 부풀어 있다. 생활수준이 나아지면서 음식점에서 단체 주문이 들어오는 등 유기 수요가 꾸준히 늘고 있기 때문이다. 金옹은 조심스럽게 새로운 전성기를 꿈꾸고 있다.

안성=신준봉 기자

사진=조용철 기자

◇ 여행쪽지=金옹의 유기 공장이 6년전 시외곽 미양공단으로 이주하면서 기존의 공장건물은 유기 제품을 전시.판매하는 안성맞춤유기공방(031-675-2590)으로 탈바꿈했다.

그릇.촛대 등 생활 유기는 물론 각종 장식품.제기(祭器).불구(佛具) 등 수백여종의 유기 제품을 판매한다.

다리품 팔아 멀리서 찾아갈 경우 유기 종류에 따라 1~2만원까지 에누리 받는 재미가 쏠쏠하다.

서울 명동 한국명품관(02-778-6529)에서도 안성 유기를 정찰가 판매하고 있고 우체국 통신판매로도 구입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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