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헌익의 인물 오디세이] 언어학자 박병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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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한국인과 일본인은 둘이 아니다. 삶과 죽음이 둘이 아니다(生死不二)고 하는 불교적 불이를 말하고자 함이 아니요, 또 사해(四海)동포주의를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과학적으로 살펴보면 한국인과 일본인은 대체로 핏줄이 같다는 뜻이다.

지금도 동해안 어디쯤에서 배를 타고 가만히 앉아 있으면 해류와 바람이 저절로 일본 중서부 해안 어디쯤에 가닿게 해준다. 동해의 해류는 북쪽 오호츠크로부터 남하해 동해안 쪽으로 서진하다 대한해협 부근에서 일본 중서부로 둥글게 돌아가는 타원형을 그리기 때문이다.

남해안에서 일본에 가는 것은 폭풍우만 치지 않는다면 식은 죽 먹기 비슷하다, 아득한 그 옛날 사람들은 그렇게 반도에서 일본으로 건너갔을 것이다. 저 남방에서 일본으로 온 사람들도 있었겠지만 당시의 항해술이 많은 사람을 실어날랐으리라고 보는 것은 과학적이지 않다.

그러니 상고시대에는 한국인과 일본인이 쓰는 말이 비슷했을 터이고 아예 거의 같았을 것이라고 판단하는 것은 어쩌면 상식적이지 않나 싶다. 더구나 말은 비행성 씨앗이나 물과 같아서 바람 따라 이리저리 날아가 뿌리를 내리고, 낮은 곳으로 흘러흘러 가며 여기저기 스며들게 마련이다.

일본말의 뿌리가 우리말이라는 이런 생각은 이 방면을 천착해 독보적 성과를 쌓은 언어학자 박병식(73)씨의 설명을 듣고나면 보다 분명해지고 확신을 얻게 된다. 朴씨는 일본말의 바탕은 경상도 사투리라고 단언한다.

일본은 670년부터 일본이라는 한자로 국호를 삼았는데 그 당시는 이를 닛폰이라고 읽지 않고 야마토라고 읽었다. 문제는 이 야마토가 현재의 경북 고령 지방에 있던 나라로 『위지』에 적혀 있는 야마국(邪馬國), 곧 가야의 이름이라는 것이다(邪의 당시 발음은 야).

이는 일본열도를 고대에 개척해 나라를 세운 사람들이 가야족이었음을 증거하는 것으로, 자연히 당시 일본에 건너간 사람들은 경상도 말을 썼을 것이며 그 말들은 세월이 흐름에 따라 변화하여 말하자면 '경상도 사투리의 사투리' 가 됐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경상도 말의 두드러진 특징은 말을 하면서 '마' 소리를 즐겨 쓰는데 이를 일본말이 그대로 따라 한다는 것이다. 우리 표준말 '그래도' 를 경상도에서는 '그래도마' '캐도' '캐도마' 따위로 쓰는 것을 일본에서는 '게레도모' '게도' '게도모' 라 하는 게 한가지 예다. 또 의성어와 의태어를 비교해 보면 두 나라 말의 뿌리가 같다는 것이 더 명확해진다.

일이 잘 풀리는 상태를 나타내는 우리말 '슬슬' 과 같은 뜻의 일본말은 '스루스루' 이며 사람들이 뒤따라 가는 상태인 '졸졸' 은 '조로조로' , 잘 미끄러진다는 뜻의 '쭐쭐' 은 '쓰루쓰루' , 무서움에 몸을 떤다는 '벌벌' 은 '부루부루' , 키가 잘 자라는 모양인 '쑥쑥' 은 '스쿠스쿠' , 무거운 발걸음인 '터벅터벅' 은 '도보도보' 로 쓰는 등 수많은 예가 있다는 것이다.

朴씨는 나이가 쉰이 넘은 1979년부터 일본어의 어원 연구에 투신했다. 48년 함경도에서 단신 월남해 전후에 무역업에 종사하다 65년 건설회사를 설립한 그는 70년대 중동에 진출, 의욕적으로 사업을 펼쳤으나 당시 정권의 '다른 건설사 봐주기 음모' 에 걸려 뜻을 접어야 했다.

79년 은행의 부도 처리로 빈털터리가 된 그는 좌절감도 못 견뎠지만 그보다는 분노에 휩싸여 혼자서 중동에서 도쿄(東京)를 거쳐 바로 미국 뉴욕으로 건너가버렸다. 뉴욕의 골방에서 복수심에 몸을 떨며 불면의 밤들을 보내던 그는 어느날 문득 이 복수심을 건설적으로 해소하자는 일종의 각성이 자신을 엄습했다고 한다. 그 탈출의 방편이 바로 일본어 어원 연구였던 것이다.

전공학자이기는커녕 젊은 시절 어문학도도 아니었고 더욱이 무역회사.건설회사를 경영하던 그가 뚱딴지같이 어떻게 일본어 어원 연구에 몸을 던졌을까 하는 호기심은 자연스럽다.

그는 자신이 일제시대에 중학교를 다닐 때부터 일본인보다 일본말을 더 잘했고 월남 직전 성진의전(城津醫專)재학 시절에는 독일어나 라틴어.중국어.프랑스어도 익힐 만큼 어학을 좋아했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늘 의식 속에는 "일본말과 한국말은 같은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잠재해 있었다고 한다.

'그래 과거는 훌훌 털고 젊을 때부터 좋아하던 어학 그중에서도 일본어 연구를 필생의 업으로 삼자' 는 것이 당시 그의 심경이었을 것이다. 뉴욕의 후미진 동네에서 세운 그의 뜻과 하루 17시간씩 공부에 매달린 실천의 결과는 놀라운 것이었다. 84년 첫번째 저술 『지금 가야족은 슬프다』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그는 26권의 책을 상재했다.

특히 86년 펴낸 두번째 책 『야마토말의 기원과 고대조선어』는 한.일 두 나라에서 쓰이고 있는 한자음을 비교하여 두 나라 말소리에는 일정한 소리변화 법칙이 존재한다는 것을 입증해 학계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5만자의 한자음을 일일이 추적 비교한 이 연구는 학계에서도 상상 못한 독창적 성과였다.

예컨대 우리는 한자 한(韓.寒.汗)을 '한' 으로 읽는 데 비해 일본에서는 이를 모두 '간' 으로 읽는다. 그런 식으로 일본의 모든 말에는 한국에서 일본으로 언어가 건너가면서 변화되는 법칙이 있음을 발견한 것이다.

그는 또 전기(前記)한 야마토 건국 사실 등에 주목해 일본의 『고사기』『일본서기』를 중심으로 일본 고대사 연구도 병행해 『만엽집』 등 그들의 책에 들어 있는 암호와 다름없는 글귀들을 풀어냈다.

예를 들어 '일본서기' 에 있는 '마비라구도능(摩比羅矩都能)구례두례(俱例豆例)어능폐타(於能弊陀)…' 라는 구절은 일본학자 아무도 무슨 뜻인 줄 몰랐는데 그가 해독했다.

위의 글은 일본인이 우리말을 한자로 표기한, 말하자면 일본식 이두로, 그 뜻은 (백제가 망하니까) '마(이제)비락뜨는(버렁뱅이를 하러 떠나는)구례(지금의 구례로 섬진강을 통로로 일본과 백제가 교류했기 때문에 백제사람들을 지칭하는 말)들이 오는 해(年)다' 라는 것을 밝히니까 일본학자들이 입만 벌리고 아무 말도 못했다는 것이다.

그런 연구로 朴씨는 백제가 망하기 전까지는 우리말과 일본말이 같았다고 확신한다. 현재의 일본말은 그 후 교류의 단절로 인해 나름대로의 변화가 가속된 결과라는 것이다.

그는 『야마토말의 기원과 고대조선어』가 발간되자 일본인들로부터 "그러다 칼침을 맞을지도 모른다" 는 협박도 받았다고 한다.

또 밤 12시면 어김없이 전화벨이 울려 받으면 아무 말도 없이 끊어지곤 하는 위협이 3년이나 계속됐다는 것이다. 그러다 그의 책이 계속 나오면서 과학적으로 일본인들을 설득하니까 위협은 없어지고 지금은 오히려 고정독자가 많이 생겨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그런 팬들 중에는 그에게 연구비를 많으면 1백만엔(1천만원)이나 보내주는 사람도 있었고, 가난한 이는 농산물 따위를 부쳐주는 경우도 많다고 했다.

어느 해에는 계속되는 일본 내에서의 강연 때문에 목에 이상이 생겨 병원을 찾았더니 그를 알아본 의사가 수술.입원비와 약값 일체를 무료로 해주더라는 것이다. (그는 당시 치료비가 부담돼 한국에 와서 수술을 받을 생각이었다. ) "선생님이 우리(일본)학자들도 캐내지 못한 우리의 뿌리를 가르쳐줘 고맙다" 는 게 그 의사의 말이었다.

또 일본 사회당의 어느 의원은 그의 글에 매료돼 그가 월남할 때 북에 두고온 어머니를 43년 만에 평양에서 만날 수 있게 주선하기도 했다.

그의 소망은 한국말과 일본말의 뿌리가 같다는 것을 일본학자들이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모두 그의 연구를 긍정하면서도 공적 장소에서는 입을 다무는 것은 학자적 양심의 문제라는 것이다. 그의 주장과 성과를 인정해야 그 다음 단계의 양국간 연구로 발전이 될텐데 왜 그렇게 '속 좁은 태도' 를 보이는지 안타깝다고 했다.

그의 책을 읽은 이름 모를 많은 일본인들 중에는 "제가 전에는 반한파였는데 이제 친한파가 됐다" 는 대범함을 나타내는 사람도 있는 것에 비춰보면 더욱 일본학계가 섭섭하다고 했다. 그러나 히로시마대가 그에게 자극받아 '한국어' 를 정규과목으로 채택한 데 대해서는 고마움을 표했다.

우리말이 건너가 일본말이 됐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의 문화적 우위를 나타내는 것은 전혀 아니다. 한.일 친선은 결국 문화적 교류에 바탕을 둔 상호 이해일 수 밖에 없다.

박씨는 최근 22년간의 연구를 집약한 『야마토말 어원사전』이라는 책을 그의 다른 모든 책처럼 일본어로 펴냈다. 일본의 출판사가 "왜 일본말의 뿌리를 한국사람에게 배워야 하느냐" 는 속내를 비추며 출판을 거절해 한국의 출판사에서 발간했다.

이 사전이 일본학계에서 검토되면 현재 일본어 사전에 실린 어원 설명은 99%를 고쳐야 할 것이라고 그는 믿고 있다.

한 예로 일본사전에 쓸데없는 짓이라는 뜻의 '겐모 호로로' 가 있는데 그 어원을 '꿩의 울음소리를 의성한 것으로 꿩울음처럼 쓸데 없는 짓을 말라는 데서 유래' 식으로 설명했지만 이도 경상도 말 '건 머 하러러(건 머하그러 - 그건 뭐하러 하나)' 에서 왔다는 것이다.

朴씨는 79년 뉴욕에 건너가 일본에서 체류한 5년을 빼고는 쭉 그 곳에서 살다 최근 영구 귀국했다. 그의 일본어 어원 연구는 그 자체 학문적으로 평가받아야 하지만 무엇보다 그로부터 우리가 배울 것은 인간의 패기와 집념이다.

그는 "중학 시절 60세가 넘은 분이 입학해 그 후 대학까지 마치는 것을 봤다" 고 했다. 뜻을 세우는 건 정말 나이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이헌익 <스포츠.문화 에디터>

사진=김성룡 기자

<박병식 언어학자 약력>

▶1929년 함경북도 경성(鏡城)출생

▶日도카이대학 일본문학부 연구원

▶시마네대학 강사

▶歐洲한국연구협회(AKSE)회원

▶주요著書(일본어 출간)

『지금 가야족은 슬프다』『야마토말의 기원과 고대朝鮮語』 『일본어의 비극』 『박병식 일본고대사』 『이즈모족의 소리없는 절규』 『일본어의 발견』 등 27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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