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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 사형 명령서 찾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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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1909년 10월 26일 중국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직후의 안중근 의사(왼쪽). 22일 정부가 처음 발굴해 공개한 안 의사 사형집행 명령서 사본. [국가보훈처 제공]

일제의 조선 침략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사살한 안중근 의사의 사형집행 100년(26일)을 맞아 당시 일제가 사형집행을 명령한 기록 원본이 22일 처음 공개됐다. 국가보훈처는 안 의사가 순국한 중국 뤼순 감옥을 관할하던 일제 관동도독부의 ‘정황보고 및 잡보’ 사본을 일본 외무성 외교사료관으로부터 지난달 확보해 이날 공개했다.

1910년(명치 43년) 3월 24일 관동도독부 지방법원 검찰관에 발급된 사형집행 명령서는 “아래(안 의사)에 대한 사형집행을 명함”이라며 “한국 평안도 진남포, 무직, 안응칠(안 의사의 어릴 때 이름) 안중근, 33세, 죄명 살인범, 형명 사형, 판결 언도 명치 43년(1910년) 2월 14일”이라고 기록했다. 사형은 이틀 뒤인 3월 26일 집행됐다.

관동도독이 일본 외무대신에게 보고한 ‘정황보고 및 잡보 4권’도 공개됐다. 1909년 10월 26일 이토를 사살한 직후 일제에 체포된 안 의사가 그해 12월까지 수감됐던 뤼순 감옥의 정황을 담은 내용이다. “하얼빈에서의 살인사건으로 입감한 (안 의사 포함) 한국인 9명은 엄정 격리할 필요가 있어 모두 독거구금했다”며 “사건의 중대함으로 인해 감방 내외를 엄중히 경계할 필요가 있다”고 적고 있다. 또 “감옥 내에 임시법정을 설치해 단속 처우의 적실 및 심문사항의 비밀을 확보하는 데 힘쓰고 있다”고 기록했다. 이어 “특히 야간에는 수시로 간수로 하여금 그 행동을 비밀 정탐케 하고 종래의 감독자 외 간수 6명을 배치하던 것을 8명으로 증가해 만일의 위험을 방지하는 데 힘썼다”고 덧붙였다.

보훈처는 “일제가 안 의사 수감 이후 경계를 이렇게 강화한 것은 그의 유해가 우리 동포에게 탈취되거나, 고국에 안장될 경우 그 묘역이 항일운동의 본령이 될 것으로 우려했기 때문일 것”이라고 분석했다. 김양 보훈처장은 “아직도 안 의사의 유해 매장지를 찾지 못하고 있다”며 “자료를 보관한 일본이 더욱 성의있게 자세를 전환할 것을 촉구한다”고 말했다.

◆발견된 추가 자료=관동도독부 정황보고 자료에는 안 의사를 포함해 228명의 독립운동가가 적시돼 있다. 이 중 89명은 처음 확인된 인물들이다. 증거품 목록엔 당시 러시아에서 발간됐던 한자신문 ‘원동보’ 1부와 이토의 암살을 암시한 동청철도 기차 발착 시간표, 손가방 등이 적혀 있다. 사형 직후 안 의사의 동생들이 일제에 유해를 돌려달라고 요구했으나 일제가 거절한 내용이 담긴 ‘두 동생의 유해 인도 요구에 대한 처리 경위 보고서’ 사본도 확보됐다. 안 의사의 동생 안정근이 안 의사의 사진으로 5종의 엽서를 만들어 미국 하와이에 300장, 샌프란시스코에 500장을 보낸 기록도 사진과 함께 발견됐다. 일본 감옥협회가 1910년 1월 20일 발행한 감옥협회잡지에서 “(안 의사가) 보통의 형사피고인이지만 국사범과 동격으로 취급되고 있다”는 내용도 나왔다.

김민석 군사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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