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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157> 일류 인물들이 만든 이류당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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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겨울 난징(南京)의 황먀오쯔(黃苗子) 집 마당. 앞줄 왼쪽부터 청자룬(盛家倫), 장루이팡(張瑞芳), 위펑(郁風). 뒷줄에 딩충(왼쪽 둘째), 황먀오쯔(오른쪽 셋째), 진산(오른쪽 둘째)이 서 있다. 김명호 제공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상하이의 일류 문화인들 거의가 전시수도 충칭(重慶)을 향했다. 공산당 근거지 옌안은 주로 젊은 축들이 줄을 이었다. 충칭은 도시 전체가 피란민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입는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먹고 자는 문제가 보통 일이 아니었다. 이들 앞에 생각지도 않았던 구세주가 나타났다. ‘이류당(二流堂) 당주(堂主)’로 중국인들에게 영원히 회자될 ‘20세기의 맹상군(孟嘗君)’ 탕위(唐瑜)였다.

탕위는 남양화교 출신이었다. 집안이 버마의 대자본가였지만 사업보다는 영화 쪽에 관심이 많았다. 문장도 신랄했다. 여배우 롼링위(阮玲玉)가 자살했을 때 ‘누가 롼링위를 살해했나’라는 글로 상하이를 뒤집어 놓았던 장본인이 탕위였다. 중공 총정치부 선전부장 판한녠(潘漢年)과 화남국 서기 샤옌(夏衍) 등 중공의 문화정책 담당자들과 친했다.

중일전쟁 기간 버마에서 윈난(雲南)으로 연결되는 도로는 외부의 보급품이 중국에 유입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다. 탕위는 랑군에 있는 형들에게 충칭에서 사업을 하겠다며 온갖 거짓말을 다해 돈을 타냈다. 대형 트럭 2대와 최고급 승용차에 뭔가를 가득 싣고 충칭에 와서는 차량들까지 처분해 버렸다. 원로 연극배우 뤼언(呂恩)의 회고에 의하면 자산가치가 은행을 하나 차려도 될 정도였다고 한다.

탕위는 대형 거실이 딸린 번듯한 집을 구입한 뒤 요리사와 세탁부를 고용했다. 상하이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문화인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중국인이라면 애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그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는 시사만화가 딩충(丁聰), 뭘 물어봐도 모르는 게 없었지만 단 한 줄의 글도 남기지 않은 음악가 청자룬(盛家倫), 여류작가 펑쯔(鳳子), 명(名)화가에 산문가였지만 지금은 서예가로 더 알려진 황먀오쯔(黃苗子), 왕런메이(王人美)와 헤어진 한국인 영화 황제 김염(金焰)과 훗날 결혼하게 되는 친이(秦怡), 왕런메이의 두 번째 남편이자 중국 발레의 초석을 놓은 현대무용가 다이아이롄(戴愛蓮)의 첫 번째 남편이었던 화가 예첸위(葉淺予), 당시에는 경제학자였던 저우유광(周有光), 극작가 우쭈광(吳祖光), 우쭈광의 첫 번째 부인이나 다름없었던 미녀 연극배우 뤼언, 한국전쟁 당시 중공군 위문단으로 나왔다가 북한 여배우와의 스캔들로 총살당할 뻔했던 미남 배우 진산(金山), 홍색공주 쑨웨이스(孫維世)에게 남편 진산을 도둑맞은 장루이팡(張瑞芳), 장칭(江靑)과 한방에 하숙했던 죄로 문혁 시절 영문도 모른 채 온갖 고초를 겪었던 황먀요쯔의 부인인 여류화가 위펑(郁風), 시장경제의 제창자 우징롄(吳敬璉)의 모친 덩지싱(鄧季惺) 등이 상객(常客)이었다.


▲1943년 충칭(重慶) 시절의 탕위.

각 분야의 내로라하는 인물들이 하루도 빠지지 않고 몰려 있다 보니 폭소가 그칠 날이 없었다. 한때 작은 사고 몇 건씩은 저질러 본 사람들이었다. 언제 무슨 말들이 튀어나와 웃음거리가 될지 몰라 여간 급한 일이 아니면 빠지려 하지 않았다. 다들 이류(二流)로 자처했다.

틈만 나면 저우언라이(周恩來), 랴오청즈(寥承志), 차오관화(喬冠華) 등과 함께 탕위의 집을 찾아와 한바탕 떠들어야 속이 시원하던 궈모뤄(郭沫若)가 이들에게 당호(堂號)를 선사했다. ‘일류인물 이류당(一流人物 二流堂)’, 세상에 이렇게 멋진 당호가 없었다. 당주(堂主)는 당연히 탕위였다. 모두 흡족해했다. 20여 년 후 거의 죽다 살아날 정도로 날벼락을 맞으리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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