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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자유 향한 서재필의 꿈 태평양 건너 한반도에 퍼지다

중앙선데이

입력

"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1> 서재필기념관 1층 내부. 서재필 박사 유품반환추진위원회는 앞으로 ‘생활용품 전시관’과 계몽·독립운동 자료들을 별도로 전시할 계획이다. <2> 인디펜던스홀. 1776년 미국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1787년 헌법제정회의를 연 곳이다. <3> 리틀 시어터 극장. 3·1운동 소식을 듣고 미 전역에서 모인 한국인 150명이 모여 제1차 한인대회를 열었다. 서재필기념관. 서 박사가 25년간 살았으며 서재필기념재단이 보존하고 있다. [고재방 제공]


필라델피아는 독립과 자유의 요람이다. 미국 독립운동이 처음 일어난 곳이며 독립선언 때 울렸던 자유의 종이 지금도 인디펜던스홀에 보존돼 있다. 미국 최초의 수도이자 가장 유서 깊은 역사 도시다. 이곳은 특히 대한민국의 독립과 자유를 위해 서재필(徐載弼·1864∼1951년)이 활동했던 도시여서 더욱 친근감이 든다. 필라델피아는 그리스어로 형제애를 뜻한다. 한국과 미국은 필라델피아라는 도시와 서재필이라는 인물을 통해 끈끈하게 엮여 있다.

20세 때 멸문지화의 역경을 겪은 서재필은 대한민국의 원조 글로벌 리더라고 할 수 있다. 갑신정변의 주역, 미국 의과대를 졸업한 한국 최초의 서양 의사, 최초의 한글신문을 발행한 언론인, 개화기 계몽운동가, 인쇄업을 운영한 비즈니스맨….

3·1운동 때 교민 150명 거리 행진 조직
1월 8일 오전 워싱턴을 출발한 필자는 뉴욕의 교통 체증 때문에 7시간 넘게 차를 달려 석양의 노을을 바라보며 필라델피아에 도착했다.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가장 먼저 인디펜던스홀(식민지 시절 주 의사당)을 찾아갔다. 빨간 벽돌 건물에 하얀 시계탑이 솟아 있는 18세기 조지아 건축 양식의 대표적 건물이다. 여기에서 1774년 제1차 대륙회의가 열렸다. 식민지 미국인들은 영국 왕 조지 3세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기 시작했다. 이듬해 제2차 대륙회의에선 독립선언서 초안을 작성하고 독립을 선언했다. 독립선언서를 최초로 낭독하면서 주민들을 불러모으기 위해 타종을 했는데 이 종이 바로 자유의 종이다. 이 종에는 ‘온 세상에 자유를 선포하고 그리하여 모든 이들을 자유롭게 하라’는 성경 구절이 새겨져 있다.

인디펜던스홀에서 서쪽으로 3㎞ 떨어진 아름다운 주택가에 19세기 말엽 빨간 벽돌로 지은 리틀 시어터 극장(현재 플레이스 앤 플레이어스 극장)이 있다. 1919년 4월 16일 고국에서의 3·1운동 소식을 듣고 미 전역에서 온 한국인 150여 명이 이 극장에 모여 사흘 동안 제1차 한인대회를 열었다. 대회가 끝난 직후 태극기를 앞세우고 인디펜던스홀까지 행진했다. 독립과 자유의 상징인 필라델피아는 행진 악대를 보내 주면서 태평양 너머 미지의 나라에서 온 한국인들의 독립과 자유에 대한 염원을 지지해 줬다.

이들은 주 의사당에 도착해 미국 정부와 국민에게 일본의 만행을 폭로하고 대한민국 독립을 호소했다. 이들의 중심에는 필라델피아에서 인쇄업을 하고 있던 서재필이 서 있었다. 그는 이렇게 연설했다. “일본은 미국인들에게 한국 사람들은 나약하기 때문에 보호자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우리는 조직된 정부의 지원을 받고 있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일본 사람들이 가지고 있지 않은 명분을 가지고 있다. 미국 국민에게 대한민국의 대의명분을 사실 그대로 보여 주기 위해 한국독립연맹을 구성하자.” 나라 잃은 국민의 설움과 독립에 대한 갈망이 느껴진다.

의사 면허를 갖고 있던 서재필은 당시 필라델피아에서 종업원 50명 규모의 인쇄업체를 운영하고 있었다. 여기서 번 돈을 독립운동의 재정적 기반으로 삼아 제1차 한인대회를 개최했고 1920년에는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에게 공개 서한을 보내 1882년 체결된 조·미조약을 준수할 것을 요구했다. 그는 1922년 상하이임시정부 외교위원장 자격으로 워싱턴 군축회의에 참석해 한국의 독립을 청원하는 연판장을 제출했다. 이어 1925년 호놀룰루 범태평양회의에 한국 대표로 참석해 일본의 침략상을 폭로했다.

서재필의 연설 장면을 머릿속에 되새기며 그가 살았던 집을 향해 발길을 돌린다. 필라델피아 인근 미디어에는 서재필이 1925년부터 25년간 살았던 집(현재 서재필기념관)이 자연보호구역의 우거진 나무들 사이에 고고하고 우아한 모습으로 잘 보존돼 있다. 펜실베이니아의 역사 유적지로 지정된 곳이다.

서재필의 집은 3층 빨간 벽돌 건물로 돼 있다. 햇살에 투영된 빨간 건물은 누군가 뛰어나와 찾는 이들을 따뜻하게 맞아 줄 것 같은 생각이 들게 한다. 기념관 안에 들어가니 원래 거실이었던 1층, 침실이 있었던 2층은 전시관으로 쓰이고 있었다. 3층은 회의실이었다. 서재필기념관에서 몇 년째 근무하고 있는 김선호 선생은 “미국의 유명 기념관을 방문하면 대부분 원형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서재필기념관도 조만간 서재필이 살던 때와 똑같이 복원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62세에 임상병리학 공부, 72세 개업
서재필이 필라델피아에 정착한 계기는 무엇이었을까. 그는 갑신정변이 실패한 뒤 일본을 거쳐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그와 함께 미국행을 선택한 박영효와 서광범은 양반 체면에 막노동은 못 하겠다며 한국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막노동을 마다 않았던 서재필은 그곳 교회의 목사 소개로 펜실베이니아에서 탄광을 경영하는 독지가 홀렌벡을 만나 그의 후원으로 필라델피아 인근에 있던 해리 힐맨 아카데미(고교 과정)를 졸업했다. 홀렌벡은 신학대 진학과 한국에서의 선교 활동을 권유했다. 하지만 서재필은 이를 거절했고 홀렌벡은 후원을 중단했다. 이 학교에는 훗날 조병옥도 다니게 된다. 110여 년 전 물설고 말 선 이국 생활에서 서재필이 겪었을 온갖 역경을 생각하니 만감이 교차한다. 서재필은 한국에 1895년, 1947년 두 차례 귀국했지만 각각 3년, 1년 만에 미국으로 돌아왔다. 그는 미디어의 자택에서 77세에 생을 마쳤다.

서재필의 집 근처에는 그가 환자를 맞이하던 병원이 있었다. 서재필은 1926년 62세의 나이에 펜실베이니아대 의학부에 진학해 병리학을 전공하고 72세에 병원을 개업했다. 30여 년 전 졸업한 의과대에 재입학해 새로운 분야를 공부한 것도 예사롭지 않거니와 70대에 병원을 개업해 생애 마지막까지 경제적 자립을 추구한 것을 보면 그가 얼마나 삶을 진지하고 당당하게 살았는지 알 수 있다. 서재필에게는 미국인 아내 뮈리엘 암스트롱(15대 대통령 제임스 뷰캐넌의 조카딸)과 두 딸이 있었다.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1890년 미국 시민권, 1893년 미국 의사 면허를 딴 서재필은 워싱턴DC에서 의사 생활을 하던 중 부인을 만났다. 화가인 둘째 딸 뮈리엘은 유한양행 창업자 유일한이 미국에서 한국으로 귀국할 때 현재 유한양행 로고로 사용되고 있는 버드나무를 나무판에 그려 주기도 했다.

한국 최초의 서양 의사가 된 서재필은 일신의 안락함을 뒤로한 채 교육과 언론을 통한 계몽 활동과 독립운동을 하느라 파란만장한 일생을 살았다. 미디어의 서재필기념관을 찾는 사람들은 독립과 자유를 향한 그의 숨소리를 지금도 느낄 수 있다.

필라델피아=고재방 하버드대 방문교수 jbkoh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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