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외환·외자·외곬인생 40년 (6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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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62. 5공 사정때 모과장

홍재형(洪在馨) 재무관보(현 민주당 의원)와 나는 런던에서 4년 가까이 근무하는 동안 국제금융 시장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혔다.

외환관리로는 안 된다는 쪽으로 사고방식도 바뀌었다. 외환에 대한 허가사무와 관리체제가 연상되는 외환국이라는 이름을 국제금융국으로 바꾼 것 자체가 그런 발상의 전환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돌이켜보면 런던 근무 덕에 나는 관료적인 발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권한을 쥐고 있다고 목에 힘을 주지 않았다. 10가지 권한이 있으면 5~6가지만 행사하고 나머지는 나눠 주었다. 흔히 10가지 권한으로 많게는 15가지의 권한을 행사하려 함으로써 문제가 생긴다.

정보도 마찬가지다. 필요한 사람들에게 제 때에 나눠 줘야 한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정보를 나눠 주지 않는 것은 흔히 실력이 없기 때문이다. 정보를 주고 나면 경쟁에서 진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내가 정보를 다 나눠주니까 나를 경계하지 않았고 오히려 나에게 의존했다.

나는 다른 사람들과도 잘 협력했다. 남과 협력하지 못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협조가 필요할 때 도움을 받을 수가 없다. 협력하지 못하는 사람은 큰 일을 할 수 없고 그런 만큼 믿고 일을 맡길 수 없다는 게 나의 지론이다.

내가 국제금융차관보로 있을 때 재무차관은 고 박봉환(朴鳳煥) 동력자원부 장관이었다. 내게 재무차관 자리를 물려 준 그는 정도를 걸은 공직사회의 한 사표(師表)였다. 그는 고 김재익(金在益) 청와대 경제수석에 앞서 전두환(全斗煥) 전 대통령에게 경제를 가르친 초대 가정교사이기도 했다.

5공이 들어선 후 관가에는 사정 바람이 휘몰아쳤다. 재무부에서도 1급 몇 사람이 사표를 냈고, 위에서는 리스트에 올라 있는 서기관들의 사표도 받으라고 성화였다. 나에게 할당된 과장의 인사 기록을 보니 딱히 사표를 받을 만한 결함이 없었다. 현대아파트 특혜 분양 때 구설에 올랐던 그는 부친이 소싯적 친구인 고 정주영(鄭周永) 현대그룹 회장에게서 받은 분양권으로 마련한 집에 들어가 산 죄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 후 구속된 전임자의 구명운동 차원에서 동료애를 발휘한답시고 어리숙하게도 받지도 않은 구두표 한 장을 받았노라고 허위로 자술서에 기록한 것이 빌미가 됐다.

당시 전임자가 저지른 잘못은 일반적인 관행이었고 큰 죄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몇 사람이 허위 자술서를 작성했다는 것이다. 나는 "그래도 그렇지 기록이 남는데 신상에 관한 문제를 그런 식으로 처리하면 어떻게 하느냐" 고 야단을 쳤다.

나는 박차관을 찾아가 "도저히 사표를 받을 수 없다" 고 말했다. 얘기를 듣고 난 그는 모처에 다녀왔고, 그 과장은 재무부 산하 지방관청으로 좌천되는 데 그쳤다. 그 소식을 전하며 박차관이 내게 "당신처럼 살면 무슨 걱정이 있겠어" 하고 말하던 기억이 난다. 그 후 그 과장은 물 만난 고기처럼 승승장구했다.

훗날 워싱턴 관세관을 거쳐 연구기관에 몸담은 그는 외화 암거래 대책 이론 분야의 1인자가 됐다. 너나 없이 불안해 할 때였지만 "아무리 서슬이 퍼래도 죄 없는 사람을 희생시킬 순 없다" 며 사표를 못 받겠다고 버틴 결과 애꿎은 희생을 막을 수 있었다.

나더러 관운이 좋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관운이란 윗사람을 잘 만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내게 최대의 관운을 열어 준 사람은 전두환 전 대통령이었다.

언젠가 『과학자도 할 말 있다』는 제목으로 어떤 학자가 쓴 책에서 전 전 대통령이 경제 각료들에게 전별금으로 몇 억원씩 줬다고 적은 것을 보았다.

나는 전대통령으로부터 전별금으로 10원짜리 하나 받은 일이 없거니와 내가 알기로 당시 경제 각료들 중 거액의 전별금을 받은 사람은 없다. 군출신 측근들에게 거액을 줬다는 기사를 접한 일은 있다. 기자건 학자건 사실 여부를 확인하지 않고 근거 없이 남을 비방하는 풍조도 이제 사라졌으면 한다.

정인용 前경제부총리

정리=이필재 이코노미스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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