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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희덕 4번째 시집 '어두워진다는 것' 펴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0면

나희덕 시인이 네번째 시집 『어두워진다는 것』(창작과비평사.5천원)을 펴냈다. 시집을 펴내자마자 김달진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됐다는 통보도 받았다. 올해로 12회째를 맞는 이 상은 삶을 일깨울 수 있는 정신적 깊이와 함께 시적 형식과 언어의 울림을 갖는 시에 주어진다.

198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한 나씨가 10여년만에 이제 그윽한 울림과 감동을 주는 자신의 시적 세계로 들어섰음을 인정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흩어진 꽃잎들 어디 먼 데 닿았을 무렵/조금은 심심한 얼굴을 하고 있는 그 복숭아나무 그늘에서/가만히 들었습니다 저녁이 오는 소리를" 시집 맨 앞에 놓은 시 '그 복숭아나무 곁으로' 에서 나씨는 환한 꽃잎 다 진 복숭아 나무 그늘에서 저녁이 오는 소리를 듣는다.

저녁이 어떻게 오는가. 서산에 해 떨어지고 차차 차오르는 엷은 어둠 속으로 피어오르는 밥 짓는 포르스름한 연기와 주인을 찾는 개 짖는 소리는 이제는 낮의 화려한 방황을 접고 돌아오라는 소리로 들리지 않았던가. 나씨도 이 시집에서 젊은 날의 환희와 사랑의 아픔, 아파 터져나올 수 밖에 없었던 신음까지 점잖게 접고 그윽한 그늘과 저녁의 세계로 돌아오고 있다.

"이만하면 세상을 채울 만하다 싶은/꼭 그런 때가 초록에게는 있다//조금 빈 것도 같게/조금 넘을 것도 같게//초록이 찰랑찰랑 차오르고 나면/내 마음의 그늘도/꼭 이만하게 드리워지는 때/초록의 물비늘이 마지막으로 빛나는 때//소만(小滿)지나/넘치는 것은 어둠뿐이라는 듯/이제 무성해지는 일밖에 남지 않았다는 듯/나무는 그늘로만 이야기하고/그 어둔 말 아래 맥문동이 보랏빛 꽃을 피우고" ( '소만' 중)

24절기 중 5월 하순 소만으로 가는 요즘 나뭇잎들은 여린 초록이다. 소만을 지나면 초록은 무성한 녹음으로 넘어 갈 것이다. 그래 햇살과 함께하는 초록의 순정한 그늘이 아니라 무성한 욕망의 그늘을 드리울 것이다. 꽉 차오르는 것을 바라는 것도 욕심이고 그렇다고 텅 비우려는 것 또한 미망이라는 것을 나씨는 이 시집에서 반쯤의 그늘과 어둠을 통해 나직나직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다.

이경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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