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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윤대녕 '사슴벌레 여자' 펴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0면

"밤마다 나는 컴퓨터 앞에 개구리처럼 붙어앉아 있었고 글이 풀리지 않거나 알고 싶은 정보가 있으면 인터넷이라는 거대한 푸른 어항 속을 한 마리 금속 물고기처럼 헤집고 돌아다녔다.

이 소설을 쓰는 동안 나는 비트와 바이트의 이름으로 사랑을 했고 여행을 했으며 온갖 꿈을 꾸며 살았다. 그런데 막상 소설을 끝낸 지금 나는 왜 이다지도 외로워진 걸까. 갑자기 전원이 나가버린 컴퓨터처럼. "

소설가 윤대녕(39)씨가 장편 『사슴벌레 여자』(이룸.7천5백원)를 최근 펴냈다. 1990년 '문학사상' 으로 등단한 윤씨는 『은어낚시통신』.『달의 지평선』 등의 소설집을 내며 현대인들의 고독한 삶을 추억과 환상을 통해 신화처럼 아득하고 그윽한 시원의 세계로 끌어올린 작가란 평을 듣는다.

『사슴벌레 여자』는 기억을 잃어 현실을 가상공간 같이 살아가는 이야기다. 전철역에 쓰러져 자고 있던 젊은이는 깨어난 뒤 자신이 누구인지를 모른다. 자신을 증명할 신용카드나 주민등록증 등이 들어 있을 지갑도 잃었다.

자신을 알아볼 사람을 만나기 위해 며칠간 그 근처를 맴돌던 남자는 편의점에서 키 작은 여자 서하숙을 만난다.

난쟁이 같다는 이유로 따돌림 당하며 혼자 살고 있는 서하숙은 오갈 데 없는 그 남자와 자신의 숙소에서 같이 지낸다. 단칸방의 젊은 남녀지만 철저히 남남인 채로. 기억이 없어 하루하루를 유령처럼 살아가던 남자는 사이버 기억이식회사에서 남의 기억을 이식받는다.

그러나 기억뿐 아니라 그 사람의 감정까지도 전이된 것과 인간을 사이보그처럼 조종하려는 음모가 있음을 안 남자는 이식된 기억을 해제한다. 직장동료를 만나 자신이 잘 나가던 회사원임을 안 남자는 집에 돌아가지만 가족과 과거를 영 몰라 정신병원에 보내지기 직전 탈출해 서하숙에게로 돌아간다는 것이 작품의 줄거리다.

인터넷을 헤집고 돌아다니며 썼다는 이 작품에는 인터넷에서 얻을 수 있는 사슴벌레나 라면 등에 대한 정보가 날것으로 들어와 있다.

또 "당신에게 만약/이름이 없다면/역사가 없다면/책이 없다면/가족이 없다면//당신이 만약/벌거벗긴 채 잔디 위에 누워 있다면/그럼 당신은 누구라고 해야지?" 라는 필립 글래스의 '프리징' 이란 노래에서 이야기의 흐름까지도 끌어낸다. 원체험보다 문학이나 음악.영화.미술 등 다른 예술에서 우러나는 감흥이나 정보에 많이 의존하는 90년대 이후 소설의 특징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러면서 작가는 현대인의 정체성을 묻고 있다. 자신의 동일성만 반복 재생산하는 기억과 사이보그 같은 현대사회의 기획된 삶을 거부하고 인터넷 바다가 아니라 둘만의 따스한 소통을 위해 서하숙에게 돌아가는 그 남자는 급변하는 사회, 자신을 버리고 변화의 속도를 따라갈 수도, 그렇다고 자신의 정체성만 고집할 수도 없어 그 중간에 대롱대롱 매달린 현대인의 고독한 꿈이 아닌가라고.

이경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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