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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틴틴경제학] 우리나라 사금융 어제와 오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3면

16세기 말 영국 셰익스피어가 쓴 『베니스의 상인』은 고리대금업자의 횡포를 다룬 작품입니다. 이탈리아 베니스의 상인 안토니오가 유대인 고리대금업자 샤일록에게 '돈을 갚지 못하면 살 1파운드를 내놓겠다' 는 각서를 써주고 돈을 빌리는 대목이 나오지요. 사금융은 그만큼 인류의 뿌리깊은 관행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1950년대 암달러상을 근대 사금융의 시초로 봅니다. 이들은 군수품을 몰래 취급하는 상인에게 달러를 공급하고 채권을 거래하기도 했답니다. 이들은 암거래 상인에게 보통 하루에 1%의 이자를 받고 물품 대금을 꿔줬다고 해서 '달러 이자' 란 말이 나왔지요.

60년대엔 기업의 자금 수요가 늘면서 기업이 발행한 회사채와 어음이 사채시장의 주요 상품으로 떠올랐어요. 사채업자들은 회사채나 어음을 받으면서 높은 이자를 미리 떼고 현금으로 바꿔주었지요.

그러나 많은 중소기업들이 마구 사채를 끌어 쓰다 부도 위기에 몰리자 정부는 72년 사채(私債)동결 조치를 내렸답니다.

모든 사채를 정부에 신고토록 한 다음 동결시켜 번창하던 사채시장이 꽁꽁 얼어붙었죠. 주춤하던 사금융은 베트남 전쟁과 건설업종의 호황에 힘입어 다시 살아났어요. 신용이 나쁘거나 담보로 잡힐 부동산이 부족한 중소기업의 자금줄 역할을 하게 된 것이죠.

그러다가 82년에 이른바 '장영자 사건' 이 터지면서 사채시장이 또 문제가 됐어요. 정부가 강력한 단속을 펼치자 상당수의 사채업자는 상호신용금고로 양성화했지만 나머지는 신용카드를 담보로 직장인에게 돈을 빌려주거나 자동차 대출, 어음.수표 할인, 양도성예금증서(CD)할인 등 다양한 분야로 손을 뻗쳤어요.

93년 8월 금융실명제가 도입된 뒤 사금융이 발붙이기 어려울 것이란 전망이 많았지만 사금융은 오늘날까지 계속 살아남았어요. 사금융은 그만큼 뿌리뽑기 어려운 필요악이죠.

나이 지긋한 사람들이 일하는 것으로 알려진 사금융 시장에는 요즘 젊은층과 금융기관에서 퇴직한 사람들도 많이 활동하고 있답니다. 금융 전문지식을 갖춘 이들은 벤처기업의 주식을 거래하고 직접 투자도 해 '제3금융권' 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정제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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