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 시평

보수의 위기, 진보의 오류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1면

한국 보수주의의 위기는 성공의 위기다(crisis of success). 보수주의가 추구하던 대부분의 목표가 성공리에 달성됨으로써 보수주의는 더 이상 한국사회에 이상(理想)이나 추동력을 제공할 수 없게 되었다. 경제발전, 자주국방, 공산주의 타도에서 문맹퇴치, 도시화, 산림녹화, 질병퇴치, 산아제한에 이르기까지 역대 보수정권이 추구하던 목표들은 초고속으로 초과 달성되었다. 더 이상 보수주의가 할 일이 없어진 것이다. 오직 있다면 시장경제의 정착과 자유민주주의의 실현, 그리고 통일이다. 과거의 국가주의적 보수가 시장주의로 회귀하고 권위주의적이었던 보수가 자유주의를 주장하게 된 것, 그리고 아직도 흡수통일을 고집하는 것은 이런 연유에서다.

원래 정치와 철학은 상극

보수주의가 위기에 처하게 된 또 다른 이유는 보수주의에는 일관된 철학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흔히 한국 보수주의에는 철학이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문제는 보수주의는 별다른 철학이 있을 수 없다는 데 있다. 보수주의는 그저 있는 것을 존중하고 보수하고자 한다는 것 빼놓고는 별다른 철학이나 원칙이 없다.

주어진 전통과 현재의 상황을 잘 활용하고, 존중하고, 가급적이면 파괴하지 않고 유지하면서 새로운 것을 해나가자는 것이 보수주의다. 그 전통과 현재가 무엇이든, '객관적'으로 봐서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일단 그것이 전통이고 현재라면 그것을 받아들이고 나서 개선의 여지를 보는 것이 보수다. 주어진 것을 우선 긍정하고 본다는 얘기다. 그러다 보니 구습.구태를 긍정하고 모순된 것을 그대로 끌고 가자는 말이 되기 십상이다.

그런데 이런 얘기는 교과서를 통해, 이론서를 통해, 이념적인 틀을 만들어 전수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다. 거기에는 역사가 어느 방향으로 흐른다는 거창한 역사철학도 없고 따라서 역사를 완성하려면 혁명과 계급투쟁을 해야 한다는 등의 실천노선도 없다. 이런 철학의 부재, 이론의 빈곤은 보수주의를 지적으로 매력적일 수 없도록 만들어 버린다. 지식인들과 학생들이 열광할 수 있는 거대담론을 만들어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역사를 꿰뚫어 보고 각 계급과 지식인이 어떤 역할을 맡고 무슨 일을 해야 한다고 '과학적'으로 제시해주는 진보사관은 매력적으로 비칠 수밖에 없다. 진보는 전통과 현재를 혁명을 통해 말소하고 이론에 맞는, 역사철학이 예시해주는 미래를 당장 건설하자는 것이다. 진보에게 전통과 현재는 이상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타도하고 극복해야 할 대상일 뿐이다.

달리 말해 보수주의는 정치(politics)의 산물이고 진보주의는 철학(philosophy)의 산물이다. 그런데 원래 정치와 철학은 상극이다. 정치는 현실의 문제, 권력의 문제를 다루면서 대립과 갈등 속에서도 설득과 절차를 통해 타협과 공존을 모색한다. 진리보다, 이상보다, 이념보다 중요한 것이 타협과 공생이다. 그런 의미에서 민주주의야말로 정치의 가장 대표적인 산물이다.

반면 철학은 모든 차이와 차별을 초월할 수 있는 보편적인 원칙, 즉 진리를 추구한다. 타협과 공존이 아닌 극복과 초월이 목표다. 보수가 차이를 '다름'에서 온다고 생각한다면 진보는 다름은 곧 '사이비'라고 본다. 그리고 사이비는 결코 협상과 타협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척결의 대상일 뿐이다.

진보에게 '다름'은 척결 대상

오늘 한국의 진보는 역사를 철학으로, 정치를 철학으로 재단하고자 한다. 좌파적 역사철학을 통해 현대사를 보고 진단하며 그렇게 해서 얻은 정치철학을 가지고 모든 '사이비'들을 척결하려 한다. 모든 역사를 유물사관 아니면 민족사관에 바탕을 둔 '진보사관'을 통해 재단하고 정치를 진리로 재단하려고 든다. 그야말로 신판 '위정척사파'들이다.

그러나 정치는 결코 철학이 아니요, 역사 역시 철학이 아니다. 정치를 철학과 사관으로 재단하려는 것은 엄청난 우를 범하는 일이다. 그나마 철학다운 철학과 역사에 대한 깊은 고민이 결여된 채 정치를 난도질하는 것은 크나큰 재앙을 부르게 된다. 과거 20세기 전체주의 국가들의 비극도, 그리고 오늘날 북한의 비극도 모두 정치를 철학과 사관에 종속시키는 데서 비롯되었다.

함재봉 연세대 교수.국제사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