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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 더 지른 이 총리…"참다 못해 내가 나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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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 ‘한나라당 폄하’ 발언으로 파문을 일으킨 이해찬 국무총리가 29일 경호를 받으며 국회의사당을 나서고 있다. [연합]

이해찬 총리가 29일 한나라당 측의 사과 요구를 일축했다. 한나라당을 향해선 오히려 사과를 요구하는 등 더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그는 이날 서울 여의도의 한 식당에서 우리당 의원들과 오찬을 하면서 "한나라당이 그동안 여권을 향해 벌여온 근거 없는 좌파 공세에 대해 사과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 참석자가 전했다.

한나라당이 노무현 대통령에게 이 총리의 파면을 요구하며 공세 수위를 높였지만 이 총리 역시 지지 않고 공세로 대응했다. 그는 "색깔론 공세에 대한 한나라당의 자성과 재발 방지책 등이 논의돼야 한다"고도 했다.

이 총리는 "한나라당이 근거도 없이 정부와 여당을 좌파라고 공격해 국가경쟁력이 떨어지고 있다"며 "그런 공세로 대외신인도가 떨어져 외자유치가 중단되는 등 피해를 보고 있다"는 불만도 터뜨렸다고 한다. "한나라당이 정책에 대해 근거라도 대면서 좌파라고 공격하면 대화를 할 수 있지만, 내용상 좌파적인 정책이라고 할 게 없는데도 말끝마다 사회주의적이라는 식의 공세를 펴는 것은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말도 했다고 한다.

이 총리는 "여권에 대해 사회주의니 좌파니 하는 한나라당의 공격이 외신 등에 보도되면서 국제사회에서 실제로 믿어버리는 악순환도 끊어야 한다"며 "더 이상 이념 공세가 나오지 않도록 내가 나선 것"이라고 의원들에게 설명했다고 한 참석자는 전했다.

이 의원은 "이 총리는 '한나라당이 여당 의원들을 주사파라고 하고, 노 대통령에 대해서도 폄하 발언을 일삼는 상황에서 참다 참다 나라도 문제를 제기해야 할 것 같아 국회에서 그런 발언을 하게 됐다'고 설명했다"고 밝혔다. 오찬에 참석한 다른 의원은 "오늘 이 총리의 설명을 들으면서 28일 국회에서 이 총리가 한 강경 발언이 즉흥적이었던 것이 아니었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다른 참석자는 "이 총리가 한나라당의 사과를 거론한 것은 틀림없지만 만일 자신과 한나라당이 동시에 유감 표명을 하면 검토해 볼 수도 있다는 뜻으로 들렸다"고 했다.

이날 오찬에는 통일.외교.안보 분야 대정부 질문의 여당 질문자들인 장영달.김명자.유선호.최성 의원 등이 참석했다. 이 총리는 이들과 며칠 전부터 오찬을 함께 하기로 돼 있었다. 이 총리가 의원들을 개별적으로 만난 이 자리에서도 강성 발언을 계속한 것을 두고 당의 차기 대권 경쟁을 의식한 때문이라는 관측도 나왔다. 오찬에선 전날 정치분야 대정부 질문 원고를 통해 노 대통령을 '깍두기 머리 임금님'으로 비유한 한나라당의 주성영 의원을 강력히 비난하는 발언도 속출했다고 한다.

김성탁 기자

분노하는 한나라…"정국 파탄 총리 책임"

▶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 김덕룡 원내대표(오른쪽부터)가 의원총회에서 의원들의 발언을 듣고 있다. 김형수 기자

한나라당의 흥분은 갈수록 고조되고 있다. 이해찬 총리가 사과하기는커녕 한나라당을 자극하는 발언을 계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총리가 29일 "한나라당이 여권을 향해 좌파 공세를 한 데 대해 사과해야 한다"고 말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한나라당 의원들은 어이가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러면서 "반드시 손을 봐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한나라당은 이날 의원총회를 열어 노무현 대통령에게 이 총리 파면을 요구하기로 했다. 그 이유는 세 가지다. ▶공직자로서 중립의무를 위반했고 ▶자유민주주의에 반하는 위헌적 언론관을 보였으며 ▶정략적 목적으로 야당을 자극해 정국을 파탄 냈다는 것이다.

박근혜 대표는 의총장을 나서며 "국민의 대표로 국회에 와 있는 한나라당을 무시한 것은 국민과 민주주의를 무시하는 행태"라며 "이런 정치문화는 바로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날 저녁 기자들과 만나서는 "내가 정부에 대해 좌파라고 한 것은 주관적 판단이 아니라 객관적인 데이터에 근거한 것"이라며 "세계 여러 나라의 언론이나 경제학자들이 노무현 정부의 경제.사회정책을 두고 좌파성향이라고 하지 않느냐"고 했다. 이 총리의 한나라당 사과요구가 터무니없다는 얘기였다. 그는 이어 "여권이 소위 '4대 법안'을 강행 통과시킬 경우 장외투쟁 등 뭐든 다 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또 "강행처리 때 헌법소원도 제기할 것이냐"는 질문엔 "그런 것을 포함해 몸으로라도 막을 수 밖에 없다"고 했다.

한나라당은 이 총리 파면 요구에 대한 노 대통령의 응답이 없을 경우 총리 해임건의안이나 파면권고결의안을 국회에 내는 것도 검토 중이다. 한나라당은 또 이 총리의 발언이 공직선거법의 공무원 중립의무를 위반했다며 중앙선관위에 유권해석을 의뢰했다.

국회도 일단 계속 보이콧하기로 했다. 그래서 29일로 예정된 통일.외교.안보분야 대정부 질문도 무산됐다.

비주류는 더욱 강경한 입장이다. 국가발전연구회(발전연)와 자유포럼 소속 의원 등 보수성향이 강한 비주류는 "야당에 대한 모욕을 서슴지 않는 이 총리 파면을 이끌어내지 못하면 당 지도부는 물러나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소장파의 입장은 다르다. 당분간의 국회 파행은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강경일변도는 곤란하다는 생각이다. 원희룡 최고위원은 "국회의 장기 파행을 방치하면서까지 총력전으로 대립할 사안은 아니다"고 했다. 지도부도 마찬가지다. 이 총리에 대해선 강공을 하겠지만 여당 지도부와의 대화는 포기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박소영 기자 <olive@joongang.co.kr>
사진=김형수 기자 <kimh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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