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테크노 밸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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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오늘 개봉되는 미국 영화 '패스워드' (원제 앤티트러스트)에서 주인공인 마일로는 스탠퍼드대를 졸업한 천재 프로그래머다. 제2의 빌 게이츠를 꿈꾸는 마일로는 주차장을 개조해 친구들과 벤처 회사를 차린다. 미국 실리콘 밸리에서 탄생한 숱한 벤처 신화는 대개 그렇게 시작됐다.

1939년 차 한 대가 겨우 들어갈 수 있는 차고에서 스탠퍼드의 두 동급생인 데이비드 휼렛과 윌리엄 패커드는 전자계측장비 회사인 휼렛 패커드(HP)를 창업했다. 스탠퍼드 대학원생인 제리 양과 데이비드 팔로는 94년 캠퍼스 안의 비좁은 트레일러에서 '계층적으로 잇따라 나오는 친절한 계시(Yet Another Hierarchical Officious Oracle)' 라는 웹 검색 엔진을 만들었다. 영화에서 마일로는 거대기업의 정보독점 음모에 맞서 싸우는 다윗의 길을 택하지만 HP와 야후는 거대기업의 길을 걷는다.

6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실리콘 밸리의 신화는 각국에 수많은 아류(亞流)를 낳았다. 실리콘 펜(영국 케임브리지), 실리콘 글렌(스코틀랜드), 실리콘 와디(이스라엘), 실리콘 플래투(인도)에서 테헤란 밸리(서울 강남)에 이르기까지 실리콘 밸리를 모델로 조성된 첨단벤처 산업단지가 전세계에 걸쳐 70여곳에 이른다. 실리콘 밸리의 신화를 재현하겠다는 강한 의지가 이름에서 읽혀지지만 실상 무늬만 실리콘 밸리인 곳도 많다.

최근 국내에 번역.출간된 『실리콘 밸리를 만든 사람들』 (뉴스위크 한국판 발행)에 따르면 실리콘 밸리의 성공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기업가 정신과 끝없는 기술혁신의 결합물이다. 실리콘 밸리에서 활동하는 학자와 기업가 등 25명의 저자들은 실리콘 밸리를 하나의 '생태계(habitat)' 로 파악한다. 동.식물 군락을 위한 자연 생태계처럼 실리콘 밸리는 하이테크 벤처 기업들의 생존과 번영에 필요한 최적의 생태계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이 생태계의 특징을 책은 유리한 법규, 수준 높고 유동적인 노동력, 결과 중심의 실력주의, 리스크를 감수하고 실패를 용인하는 풍토, 산학협동 등 열가지로 요약하고 있다.

테크노 밸리 조성을 위한 현판식이 어제 대덕 연구단지에서 거행됐다는 소식이다. 테헤란 밸리와 달리 대덕 밸리는 풍부한 연구인력을 갖추고 있어 적절한 지원 시스템만 갖춰지면 한국의 실리콘 밸리로 성장하는 데 안성맞춤이라고 한다. 테크노 밸리에서 한국판 실리콘 밸리의 신화가 꽃필 날을 기대해 본다.

배명복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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