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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시평] 어떤 안락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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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요즘 일부 유럽 국가에서는 안락사 합법화 여부가 논란이 되고 있다. 네덜란드 대법원은 이미 1984년 안락사를 인정했다. 생명의 존귀함으로 보면 안락사는 용서못할 죄악이지만 위엄을 갖춘 인격체로서 살아가기 불가능한 식물인간 등의 경우 오히려 인간적인 처사일 수 있다.

***잠 설치는 金利생활자

99년 호주에서 방영됐던 방광암 환자 제인 번스(59세 여인)는 이렇게 호소했다. "나도 삶이 귀하다는 것을 알아요. 그러나 고통 때문에 더 살 수 없어요.

내가 개였다면 벌써 죽게 했겠지요. " 본인 또는 가족의 명시적 동의가 있는 제한된 경우 전문의가 주관하는 적극적 안락사를 입법화하려는 국가는 소수이지만 대다수의 나라에서 사실상 소극적 안락사가 시행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알고도 쉬쉬 하는 일이지만 고령ㆍ고통ㆍ비용부담 등의 이유로 생명유지장치를 제거해야 하는 일이 비일비재함을 체험한다.

그런데 요즘 우리 사회에 또 다른 안락사가 소리없이 다가오고 있다. 그것은 금융자산 생활자들에게 잠을 설치게 하는 악몽으로 밤마다 찾아온다.

생산과정에 들어간 생산요소 가운데 노동만이 생산물 가치를 결정한다고 좁게 보는 사회주의 시각에 따르면 임금을 제외한 이윤.이자.지대 등은 모두 불로소득이다.

이같이 좁게 보면 요즘 같이 지식기반 경제에서 더욱 중요시되는 지적재산권에서 창출되는 소득도 인정할 수 없다. '진보적' 시각의 사상가들의 오랜 꿈은 금리생활자의 안락사였다. 군사 권위정부를 물리고 등장한 이른바 '문민정부' 가 도입한 금융실명제는 경제사회의 투명성을 제고하는 바람직한 제도임에는 틀림없지만 금융자산에 대한 '진보적' 견해가 편승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금융실명제의 골자는 첫째, 금융거래 실명화이고 둘째, 금융소득 종합과세이고 그 원년이 바로 올해다. 거둬들일 세수입이 저조할 것이다.

환란 이후 고금리 시대에는 금융자산 소유자들이 상당한 금융소득을 누렸고 퇴직자들의 고통은 이것으로 덜어졌다.

이들의 씀씀이가 환란 이후 급속한 경제회복에 도움을 주었다. 근래 한자리 수 중간 수준에서 금리가 유지되고 있어 이들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다. 요즘 저금리 시대에 쾌재를 부른 계층이 있다면 금융비용이 낮아진 기업인 말고도 앞서 말한 '진보' 계층일 것이다. 왜냐하면 금리 생활자의 안락사가 임박했기 때문이다.

편지 봉투 뒷면에 써보는 어림셈을 보자. 지난해 말 30조원 안팎의 본원통화(한국은행권, 지준예치)를 밑바탕으로 시중에 대략 9백조원의 총유동성(M3)이 나돌고 있었다. 여기에 자본시장의 상품 중 고정수익 상품을 약 3백조원으로 잡는다면 도합 1천2백조원의 금융자산 총규모로 볼 수 있다.

고금리가 한창이던 때부터 요즘까지 대략 10%포인트의 수익률 감소가 있었다고 본다면 1백20조원의 소득이 소멸된 셈이다. '가진 자에게 고통을 준다' 는 입장에서 보면 박장대소할 사태이고, 퇴직자들의 입장에서는 통곡할 일이다.

***금융소득 120兆 소멸

애덤 스미스가 언급한 '초기 미개상태' 를 제외하면 자본참여(투자) 없는 생산은 없다. 투자는 저축에서 나오고, 저축이 쌓여 금융자산을 이룬다. 금융자산 축적은 경제성장 지속의 관건이다.

일반 안락사의 경우 본인 또는 가족의 죽기를 바라는 동의가 필수요건이다. 살기를 바라는 저축자들에게 내려지는 비자발적인 안락사 위험이다. 『죄와 벌』의 전당포 노인, 『베니스 상인』의 수전노가 아니라 오히려 흰 머리에 골 깊게 주름잡힌 퇴직자 등이 대표인물들이다. 깡패들이 주름잡은 악질 사채시장은 예외다.

고금리는 기업의 금융부담 때문에 바람직하지 않다. 반면 급속한 금리인하는 금융재산 위축, 실물투기 재발우려 등의 부담이 있다. 요즘 금리논쟁이 일고 있다. 경기부양이냐, 물가안정이냐가 드러난 쟁점이다.

가려진 쟁점은 금융소득자를 사회기생충으로 보느냐, 성장기여자로 보느냐, 사뭇 중요한 사회철학과 현실의 문제다. 고리사채꾼에서 영세서민을 구하고 중산층의 노후생계 불안을 덜어주는 정책이 요망된다.

김병주 <서강대 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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