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곡` 현장 리포트] '난곡' 취재 후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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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1960년대 미국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강물의 수위가 올라가면 떠있는 모든 배들도 올라간다" 고 말했다. 경기가 회복되면 국민의 부 역시 상승한다는 낙관론이었다. 하지만 경제위기 등으로 한번 심하게 부서진 '2001년 난곡의 배' 는 물이 차올라도 떠오르지 않고 있었다. 다음 장면들은 서울 신림7동 산101 일대 극빈층의 현실과 운명을 압축해 보여준다.

#장면1=지난달 27일 서울 신림7동 버스정류장에서 만난 20대 젊은이. 고교를 중퇴한 뒤 정규 직장을 얻는 데 실패하고, PC방.오락실 아르바이트 등을 전전하다 지금은 공사판에 나간다. 사회가 자신을 완전히 버렸다고 생각하고 있다.

#장면2=취학 전 자녀를 둔 30대 중반의 주부는 탈출구 없는 가정생활을 언제까지 유지해야 할지를 놓고 고민 중이다. 가난을 이기지 못하고 주저앉아버린 남편, 일을 하고 싶지만 육아에 발목잡힌 자신…. "빈곤층 여성들이 고달픈 삶을 견디지 못해 가정을 버리고 있다" 는 어느 학자의 말이 떠오른다.

#장면3=밤이면 개.고양이 무리가 신림7동 산동네 골목길을 어슬렁거린다. 재개발을 앞두고 주민들이 하나 둘 이주하면서 버림받은 신세가 된 것이다. 이곳을 대책없이 떠났거나, 떠날 상당수 주민은 기약없이 어딘가를 서성일 게 뻔하다.

취재팀이 난곡의 저소득층 밀집지역에 들어가본 결과 상당수 극빈층이 당초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깊은 빈곤의 함정에 빠져 있었다.

취재팀이 접촉한 주민의 3분의2 이상은 외환위기 이후 한번도 일자리를 갖지 못하고, 절반 이상은 '영영 빈곤 탈출이 불가능할 것' 으로 생각하고 있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희망의 불씨는 곳곳에 남아 있었다. 난곡지역엔 현재 10여개의 시민.종교단체들이 지역주민의 아픔을 어루만지고 있다. 이들의 활동 덕분에 난곡에는 공동체 문화가 형성돼 있다. 취재과정에서 만난 수많은 어머니들이 굳센 자활의지를 갖고 있었다.

취재팀은 ▶2백가구를 면접조사하고▶3대가 모여 사는 20가구의 가계(家系)를 추적하며▶빈곤전문가 20여명을 인터뷰하는 등 국내언론 사상 처음으로 본격적인 '조사 보도' 를 시도했다. 빈곤실태를 정확히 분석하기 위해서였다. 취재과정에서 놀란 건 우리 사회에 빈곤에 관한 기초통계나 연구논문이 너무 빈약하다는 사실이었다.

난곡의 빈민지역은 오는 6월 이후 재개발이 되면 영원히 사라진다. 하지만 주민의 상당수는 주변 서민층 연립주택의 지하방 등으로 스며들 것이다. 이렇게 되면 빈민문제가 해소되기는커녕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확대 재생산될 수도 있다.

이번 보도를 계기로 우리 사회의 엘리트층이 입에 올리기를 꺼려온 빈곤문제를 터놓고 토론할 수 있게 되길 희망한다. 이제부터라도 모두가 무릎을 맞대고 새로운 빈곤대책을 논의해보자.

이상복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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