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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기적 외모 캐릭터 "못생겨서 잘 나갑니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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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8면

예쁘고 앙증맞은 캐릭터가 인기를 끄는 시대는 지난 것 같다. 최근 노트.수첩.필통.인형 등 팬시용품으로 출시돼 인기를 끌고 있는 캐릭터를 보면 단순한 선에 어딘지 우울하며 약자(弱者)의 인상이 강하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패배자(loser)' 캐릭터라고 부르기도 한다.

◇ 미남.미녀 캐릭터는 옛말〓깜찍한 표정.화려한 색상을 특징으로 하는 미키마우스.트위티.키티류의 기존의 캐릭터와는 뚜렷이 차별된다. 출시 두달 만에 인형 15만개가 팔렸다는 국산 캐릭터 엽기토끼(마시마로)를 보자.

물론 엽기토끼는 자신보다 덩치가 월등하게 큰 곰도 너끈히 제압하는 '무서운 놈' 이긴 하지만 겉모습은 왜소하기 짝이 없다. 그나마 눈도 감아 도대체 이 놈이 뭔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기도 힘들다. 같은 토끼 캐릭터인 워너 브러더스의 벅스 버니만 해도 영리하고 날렵한 인상인데 말이다.

엽기토끼의 팬들은 인기 비결에 대해 "조용하고 연약해 보이지만 유사시에 돌출 행동을 하는 엽기토끼를 보면 스트레스가 풀린다" 며 '대리만족' 론을 펼친다. 원작자 김재인씨는 "미키마우스처럼 화려하고 또렷한 외양이 아니라 단순하고 특징없게 생겼기 때문에 보는 사람이 자신의 모습을 투영할 수 있는 것 같다" 고 설명한다.

최근 네티즌 사이에 화제가 되고 있는 로이비주얼의 플래시 애니메이션 '우비소년' 도 그로테스크한 모습이 특징이다. 노란 비옷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뒤집어쓴 우비소년은 홑꺼풀의 작은 눈에 주근깨마저 났다. 못생겼다. 게다가 하는 일마다 되는 것이 없고 실수 연발이다. 요샛말로 하면 '왕짜증' 캐릭터다. 엽기토끼나 우비소년은 전혀 '팬시' 하지 않다.

◇ '엽기적' 인 '나' 의 모습?〓그런데 이런 '우울한' 캐릭터들이 인기를 끄는 이유는 뭘까. 우선 팬시상품 업계 관계자들은 "이제는 그냥 예쁘고 귀여운 쪽보다는 뭔가 엽기적인 요소가 있어야 호소력을 갖는다" 고 분석한다.

'엽기적' 이란 말은 지난해 한국 사회에서 그 사전적 의미를 완전히 탈피해 이제는 '재미있다' '개성있다' 혹은 '죽인다' 라는 뜻으로 통용되고 있다. 영어식 표현으로 하자면 '쿨(cool)' 이다. 둘째로 단순히 '엽기적' 인 데서 그치지 않고 거기에서 어딘지 '내 얘기 같은' 친근함을 느낄 수 있다는 것도 이들 캐릭터의 공통점이다.

대학생 서보라(23.여)씨는 "정상적인 모습이 아니라 어딘가 불완전하다는 데 공감을 느끼는 것 같다" 고 말했다.

가령 고게빵은 자신의 머리를 벅벅 긁으며 비듬처럼 빵가루를 떨어뜨리고 다닌다. 그러면서 오븐 앞에서 구워지길 기다리는 빵반죽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니네는 나처럼 시꺼멓게 타지마. " 정상적인 대열에서 탈락한 '왕따' 고게빵의 눈은 "나의 빵 인생은 끝났다" 는 충격으로 허옇게 뻥 뚫렸다.

다레판다도 마찬가지다. 다레(たれ)는 '늘어진, 처진' 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죽순을 갉아 먹으며 느긋하게 인생을 즐기는 판다가 아니다.

축 늘어진 모습은 지친 현대인을 상징한다. 정신없이 돌아가는 현대 사회에서 도저히 정상 속도를 따라갈 수 없는 현대인이다. 다레판다는 1996년 일본 San-X사에서 처음 출시된 이후4년 동안 6백여종의 상품이 3백억엔(약 3천억원)을 벌어들인 히트 캐릭터다.

◇ 각박한 사회상 반영〓지난해 말 닛케이(日經)신문은 고게빵과 다레판다를 '무표정 캐릭터' 라고 명명, 소개했다. 닛케이 신문은 "수많은 캐릭터들이 있지만 '무표정 캐릭터' 는 불황.경쟁.인간소외 등 시대의 흐름과 잘 맞아떨어졌기 때문에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고 분석했다.

고게빵은 90년대 말 일본에서 심각하게 대두했던 '이지메(집단 괴롭힘)' 를 탄생 배경으로 한다. 우리나라에는 '왕따' 가 있다. 고게빵 상품을 국내에서 출시한 리코아트 김철호 사장은 " '왕따' 에 시달리는 중.고생들이 '내 얘기 같다' 고 말한다" 고 했다. 국내 상품에서는 삭제됐지만 고게빵의 대사에는 "배회하러 가자" "자살하자" 는 내용도 있다.

또 다레판다의 디자이너는 회사에 입사해 첫 작품으로 제출한 기안이 번번이 퇴짜를 맞자 기운이 빠져 책상 위에 엎드려 있다가 자신의 모습에서 다레판다를 착안했다고 한다.

하긴 직장에서 날마다 상사에게 깨지고 후배.동료에게 치이는 회사원의 스트레스는 만국 공통이니…. 여하튼 여성들의 짧아진 스커트 길이에서 호황(好況)의 기미를 읽어내는 것처럼 '엽기' 캐릭터들의 부상에서 그만큼 팍팍해진 삶의 무게를 느낀다고 하면 지나친 호들갑일까.

기선민 기자

<고게빵> 고게(こげ)는 '탄, 그을린' 이란 뜻의 일본어. 시꺼멓게 다 탄 빵이다. 누가 다 탄 빵을 살까. 그래서 고게빵은 소비자들에게 외면당한 슬픔과 분노로 항상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있다.

<부르부르도그> 부들부들 떠는 강아지다. 무당벌레만 보면 기겁을 한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한 표정이 애처롭다. 보고 있으면 좀 심란하다. 어딘가 모성애를 자극한다.

<다레팬더> 일반 팬더보다 눈이 심하게 처져 귀엽다기보단 기괴하다는 느낌이 강하다. 아무 생각없이 바닥에 엎어져 있는 게 취미다. 다리가 매우 짧아 굴러서 이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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