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을 열며] 54세로 끝난 현대건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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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1915~2001년.

1947~2001년.

위는 고(故)정주영 전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생존기간이다. 그렇다면 아래는□ 鄭회장이 한국 제일로 키웠던 현대그룹의 모기업 현대건설의 생존기간이다.

아직 살아 있는 기업을 놓고 무슨 망발이냐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민간기업 현대건설은 54세로 죽었다. 지난달 29일 정기 주총이 열리던 날이었다. 鄭회장 타계의 슬픔을 이기지 못한 듯 곧바로 그를 따라 갔다.

지금의 현대건설은 공기업으로, 지난주 태어난 신생회사일 뿐이다. 사기업 현대건설의 아버지가 鄭회장이었다면 공기업 현대건설의 부모는 정부와 채권은행단이다.

◇ 현대건설 사태의 본질은 뭔가

자력갱생에 실패, 목숨을 반납한 현대건설을 채권은행들이 2조9천억원짜리 고단위 응급주사를 놓아 살려놓은 것이다. 그런데 다른 부실 건설회사와는 달리 현대건설은 왜 법정관리를 하거나 부도를 내지 못하는가. 여러 말이 있을 수 있지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엄청난 덩치 때문이요, 정치적 판단의 부산물이기 때문이다.

현대건설이 우방이나 청구 정도였다면 鄭회장이 현대건설을 따라 운명했을 것이다. 동아건설도 대규모 대북사업을 벌이고, 출자나 빚보증으로 얽힌 계열사가 많았더라면 청산되는 운명을 피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99년 7월 정부가 대우그룹을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에 넣기로 결정했을 때 국내외 언론은 이제 한국에서 대마불사(大馬不死)란 신화는 사라졌다고 대서특필했다. 그러나 대마는 역시 그렇게 호락호락한 놈이 아니었다.

◇ 정부와 채권단의 해법은 어째서 문제인가

다음과 같은 의문이 끊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의문①3조원 가까운 돈을 지원하면 살아날 수 있다고 했는데 구체적인 근거는 뭔지 속시원한 설명이 없다. 비용최소화를 위해 여러 방안 중 출자전환을 선택했다고 하는데 다른 방안과 비교한 수치는 어디에 있는가.

②현대건설은 단순한 유동성 위기인가, 구조적인 문제기업인가. 채권단은 이 회사가 지난해 5천억원의 영업이익을 낼 것이라고 장담해 왔지만 실제로는 2백40억원에 그쳤다. 물론 이자 갚기에도 턱없이 부족한 돈이었다. 이미 대세가 기운 것 아닌가.

③해외부문에서 추가 부실이 드러날 경우 또 자금을 투입할 것인가. 출자전환 결정으로 채권단은 이제 주주로 신분이 바뀐다. 운신의 폭이 전보다 더욱 좁아지는 상황이 아닌가.

④주인이 분명한 민간기업도 버티기 힘든 살벌한 건설업계에서 공기업이 살아 남을 수 있을 것인가. 또 한양.우성건설 등에서 보듯 커다란 위기를 겪은 건설회사들이 회생에 성공한 예가 없지 않은가.

⑤현대건설이 사라지기를 바라고 있던 다른 건설회사들의 입장을 생각해 봤는가. 정부의 개입으로 유력한 경쟁자를 제거하지 못했다고 비난한다면 뭐라고 하겠는가. 뿐만 아니라 공기업으로서 민간공사보다 수익성이 좋은 관급공사를 쉽게 따내거나, 수주실적에 급급해 해외공사에서 덤핑작전으로 나올 때 국내 업체끼리 제살 깎아먹는 경쟁이 벌어지지 않겠는가.

마지막으로 사족 하나. 소액주주 문제인데 과잉보호는 곤란하지 않나 싶다. 지난해 5월 현대건설 위기가 불거져 나온 이후 지금껏 경고음이 수도 없이 나왔다. 모두들 자기 책임 아래 한 투자활동이 아닌가.

심상복 국제경제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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