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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외환·외자·외곬인생 40년 (43)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5면

43. 환은과 나의 인연

조선환금은행이 한국은행에 통폐합되는 바람에 5.16 전까지 한은은 외환업무까지 담당하고 있었다.

그 후 박정희(朴正熙) 정부가 수출 제일주의를 표방하고 대외관계가 확대되면서 외자 조달의 필요성이 제기됐다.

그에 따라 외환 업무를 누가 맡는 것이 바람직한가 하는 문제가 대두했다. 지금처럼 시중은행을 육성해 외환 업무를 취급하도록 하는 것이 궁극적으로는 타당한 방향이었다.

그러나 시중은행에 넘기기엔 시기상조였다. 시중은행들은 자본금이나 인력 면에서 국제경쟁력이 떨어져 해외를 무대로 활동하기에는 미흡하다는 결론이 나왔다.

그래서 일본의 요코하마정금(도쿄은행의 전신), 중국의 중국은행처럼 일종의 특수 은행으로 외환 전문은행을 설립하게 됐다.

특수 은행을 설립하는 쪽으로 가닥이 잡히자 외국부 등 한은 일각에서 내심 환영하면서도 표면적으로는 반대하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나중에 시중은행에 넘길 것이라면 한은이 외환 업무를 계속 담당하는 편이 낫다는 것이었다. 업무를 축소해야 하는 한은으로선 나름의 입장이 있었다.

그 때 이태호(李泰浩) 외국부 차장(전 수출입은행장)이 '외환 전문은행을 만들어야 한다' 는 내용의 문서를 만들어 돌렸다. 그의 용기 있는 행동 덕에 한은 내부의 기류도 외환은행을 설립하는 쪽으로 바뀌었다. 외환은행법을 기안하며 나는 도쿄은행을 모델로 삼았다. 다만 도쿄은행의 취약점은 철저히 보완했다.

당시 도쿄은행은 점포수를 늘리는 데 제약이 있어 국내에서의 예금 조달에 애로를 겪고 있었다. 이 때문에 국내 업무쪽의 경쟁력이 떨어졌다.

나는 원화를 원활하게 조달할 수 있도록 외환은행법에서 점포수 제한 조항을 배제했다.

이와 함께 결손이 나면 정부의 예산으로 보전해 대외적으로 중앙은행에 버금가는 지위를 확보하도록 했다.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은행을 만들기 위해 국가가 공신력으로 뒷받침하도록 한 것이다. 이는 외국에서 돈을 꿀 때 정부가 보증을 서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한은이 외환보유액까지 기탁하도록 했으니 대외적으로는 거의 중앙은행이나 다름없었다. 마침내 환은법이 통과되고 나는 외환은행 설립 실무위원회의 정부쪽 부위원장을 맡았다.

당시 외환은행의 초대 행장으로는 청와대 수석비서관이었던 서봉균(徐奉均)씨가 내정돼 있었다.

하루는 이재설(李載卨) 외환국장(전 농수산부 장관)이 나를 불러 徐비서관의 제안이라며 "외환은행으로 옮기지 않겠느냐" 고 물었다. 초임 사무관이었던 내게 徐비서관은 과분하게도 부장대우에 임원실장 서리 자리를 제시했다. 솔깃한 제의였다.

설립 준비에 한창 열중하고 있는데 서봉균씨 본인이 재무장관 발령을 받았다.

이번엔 그가 직접 나를 불렀다.

"가기는 어딜 가?"

결국 재무부에 눌러앉고 말았다.

그 뒤로 외환국장이 될 때까지 주영대사관 재무관 시절만 빼고 나는 외환국(국제금융국 전신)에 근무했다. 다른 은행들은 이재국 관할하에 있었지만 외국환 업무와 외국은행 국내 지점은 외환국 소관이었다.

외환은행과 나는 말하자면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나는 감독 업무보다 육성쪽에 힘썼고 나름대로 정성을 다해 외환은행 업무를 지원했다.

1983년 7월 경제기획원 차관을 그만두고 외환은행장으로 갈 때 전두환(全斗煥) 대통령은 "외환은행을 강화하기 위해 나를 보낸다" 고 말했다.

차관회의의 당연직 의장으로 회의 준비를 하고 있던 어느 날 청와대에서 곧 들어오라는 연락이 왔다.

정인용 前경제부총리

정리〓이필재 이코노미스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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