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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영섭의 영화 질주] '퀼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6면

지금은 새디즘의 대명사로 유명한 사드 후작은 18세기 프랑스 혁명이 잉태한 최고의 스캔들 메이커였다.‘저스틴’‘줄리엣’‘소돔에서의 1백20일’등 그의 작품은 극도의 가학적·폭력적인 성묘사로 출판 직후 금서로 묶였다.

영화 ‘퀼스’는 ‘피의 후작’에서 ‘시대의 반역아’로 월드 스타가 된 사드를 현대적 관점에서 재조명한다.영화에서 사드는 아내를 때리는 치졸한 이기주의자로 나오다가 끝내 십자가를 목구멍에 삼키고 죽어가는 순교자로 승화한다.

‘퀼스’는 깃털 펜촉을 지칭하는 말.제목이 암시하듯 필립 카우프만 감독은 시대와 불화하는 인간을 통해,어떤 압력에서도 ‘쓴다’는 신념을 실행하는 인간의 의지에 대해 얘기하려 든다.

그러나 ‘퀼스’는 다른 많은 전기영화처럼 광기와 악마성에 시달리는 천재라는 상투적 구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사드는 펜촉이 없자 닭 뼈에 포도주를 묻혀 쓰고,그것마저 금지되자 자신의 피로 입던 옷에 문신 같은 글을 새겨 넣는다.여기에 ‘아마데우스’나 ‘양들의 침묵’처럼 고문실을 연상케 하는 정신병원의 엽기적 분위기가 빠질 리 없다.

실제로 1800년 당시 프랑스는 혁명의 광기가 칼을 휘두르는 시대였다.바스티유와 픽푸스 감옥에선 하루에도 수천명이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고,사드는 감방 창문을 통해 이런 모습을 지켜봤다.

당연히 사드는 혁명이 기치로 내건 이성주의 ·박애주의에 의문을 품는다.

사드의 가학성은 주체할 수 없는 열정,혹은 악마적인 광기에서 비롯했던 것이 아니라 극도의 차가운 지성과 모반의 힘에서 나왔던 것이다.

그는 절대적 고독이 가득한 감옥에서 ‘자연은 우리를 홀로 태어나게 한다.어떤 사람과 다른 사람 사이에는 결코 아무런 관계도 있을 수 없다’고 믿게 된다.

텅 빈 존재의 심연과 마주하자 프랑스 혁명에 현혹된 군중보다 완전한 개인,완전한 욕망의 극단을 꿈꾸었던 것.

이러한 맥락에서 그는 금기를 위반하는 성이란 다른 사람을 고려하지 않는 절대적인 파워에서 나온다고 주장한다.때문에 사드의 글은 선정적인 에로티시즘보다 완벽하게 금기를 위반한 성이 반복되는 잔인한 후렴구에 가깝다.

‘퀼스’에서 사드를 교화하려던 쿨미어 신부는 마음으로만 사모하던 세탁부 마들렌의 죽음 앞에서 신을 버리고 사드의 모습과 닮아간다.카우프만 감독은 인간은 양면성이라든가,사회에 저항하는 예술의 힘 같은 고정관념을 사드의 전기에 슬쩍 밀어넣으려 했다.

그래도 결국 사드는 끝내 자신의 꿈을 이룬 것은 아닐까? 사드가 궁극적으로 원했던 것이 ‘극단적 상상의 순간에 덮쳐오는 끔찍한 진실’이라면,영화라는 매체는 사드의 이상을 가장 잘 구현하는,타인의 존재를 모두 몰아낸 악몽의 팬터지가 아닐까 싶다.

심영섭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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