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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2년 비록 북핵 2차 위기] 6. 미국 "군사 대응할 수도" 한국 "안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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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북핵 위기가 한창 고조되던 2003년 2월 10일 당과 군부의 주요 간부들을 대동하고 인민군 후방군관학교를 둘러보고 있다. [중앙포토]

한번 올라간 북한 핵 위기지수는 떨어질 줄 몰랐다.

DJ 정부 임기 말인 2003년 1월 중순. 미국 정보당국은 북한의 영변 핵시설 단지에 서 있는 트럭을 포착했다. 방사화학실험실(핵 재처리시설) 주변이었다. 북한이 저수조에 보관 중인 8000개의 '사용후 핵연료봉'을 이 실험실로 옮겨 핵무기 원료인 플루토늄을 얻으려는 것으로 해석됐다. 1994년 클린턴 미 정부가 마지노선으로 그어놓고 정밀 폭격을 검토했던 움직임이었다. 2월 1일 이 사실이 일부 언론에 누출되자 부시 행정부는 대북 경고에 나섰다. "핵연료봉의 재처리는 국제사회를 협박하려는 북한의 또 다른 도발행위가 될 것이다."

정보 소식통 A씨의 얘기. "당시 미국 정보위성은 트럭을 방사화학실험실 주변에서만 포착했고, 사용후 핵연료봉 저장소 쪽에서는 잡아내지 못했던 것으로 압니다. 위성사진상으론 재처리를 위한 것이라고 단정하기엔 명확한 연결고리가 나타나지 않았지요. 그래서 핵시위의 일환이라는 분석도 제기됐어요.(북한은 그해 이 실험실에서 8000개의 핵연료봉을 재처리했다고 7월 8일 미국에 통보한다.)아무튼 이 부분은 지금도 미스터리로 남아 있습니다."

미 중앙정보국(CIA)는 당시 북한이 8000개의 사용후 핵연료봉을 재처리하면 그해 여름까지 핵무기 5~6기 분량의 플루토늄을 더 만들어낼 것으로 평가했다.

미국은 곧바로 행동에 들어간다. 2월 2일. 태평양사령부는 한반도 주변에 대한 군사력 증강을 국방부에 요청했다고 미 언론들이 전했다. 괌에 24대의 B1.B2 폭격기를 배치해 달라는 것 등이었다. 미 국방부는 이를 승인한다. 동시에 항공모함 칼 빈슨호를 일본에 배치한다.

그러자 북한이 재래식 위협수단을 동원했다. 2월 20일. 미그-19기 추정 북한 전투기가 서해 북방한계선(NLL)을 침범했다. 20년 만이었다.

4일 뒤엔 지대함 미사일을 동해로 쏘아올렸다. 콜린 파월 미 국무장관이 방한하던 날이었다. 노무현 정부는 북핵 위기가 절정에 이르렀던 25일 닻을 올린다.

◆노 대통령 당선 직후 "북핵 해결하라"=노무현 대통령 당선자에게 북핵은 최대의 투통거리였다고 한다. 2002년 12월 24일, 서울시내 안가. 노 대통령은 대선 때 통일외교 분야 자문을 맡았던 다섯 명을 불렀다. 나중에 대통령직 인수위원이 된 윤영관(서울대 교수)전 외교부 장관, 서동만 전 국정원 기조실장, 국가안전보장회의 이종석(세종연구소 연구위원)사무차장, 서주석(한국국방연구원 연구위원)전략기획실장 등 4명과 문정인 동북아시대 위원장이었다. 정부 관계자 B씨는 "이들 다섯 명과 위성락(현 주미공사)외교장관 보좌관으로 북핵 대책반이 구성됐다"면서 "북핵 대책반이 정권인수위보다 먼저 짜인 것은 북핵 문제가 얼마나 시급한 과제였는지를 여실히 보여준 것"이라고 말했다.

노 대통령은 이후 작심한 듯한 발언을 쏟아낸다. 겨냥점은 미국의 대북 강경책이었다. 12월 30일 계룡대. "미국이 북한에 대해 국지적 부분일지라도 제한적 무력공격을 하게 될 경우 북한이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그 점이 가장 걱정스럽습니다. 많은 사람은 북한이 남한에 대해 보복공격을 할 수 있다고 상정합니다.… 그런 게 전면전 우려인데 이에 대해 좀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당시엔 미국 고위 관리들이 "(대북 군사적 대응을 포함한) 모든 선택 방안이 테이블에 올라 있다"고 언급할 때였다. 따라서 이 같은 노 대통령 발언은 한.미 북핵 공조에 대한 우려를 자아냈다.

이에 대한 정부 관계자 C씨의 설명. "대통령은 당시 위기의 상승 사이클에 제동을 걸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절박했지요. 구체적으론 부시 행정부로부터 '전쟁 선택 가능성을 아예 거론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얻어내고 싶어했습니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미국에 대해 강하게 얘기한 것으로 압니다."

노 대통령의 "노(No)" 발언은 2003년 3월 중순 이후 자취를 감춘다. 3월 5일 청와대.

"나도 생각이 있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보세요. 조금만 더하다 관둘게요."

노 대통령은 문희상 대통령 비서실장, 외교안보관계 보좌진과의 오찬 때 이렇게 말한다. 북한 전투기의 미군 정찰기 위협 사건(3월 2일)을 두고 노 대통령이 미국에 과도하게 나서지 말라고 언급한 데 대해 참석자 중 한 명이 우려를 나타낸 데 대한 답이었다.

정부 관계자 B씨의 이어지는 설명. "3월 13일 한.미 정상 통화에서 부시 미 대통령은 '한반도 전쟁발발 가능성에 대해 일부 우려하는 사람도 있지만 미국의 정책기조는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모든 수단을 다 강구한다는 것'이라고 밝힙니다. 이후 미국에서 '모든 선택방안이 테이블에 올라 있다'는 얘기가 사라집니다."

그러면 통일외교분과 인수위원 4명은 어떻게 선정됐을까. 당시 인수위원 D씨의 설명.

"인수위원들이 노 대통령 선거 캠프와 선이 닿은 것은 2001년 가을부터입니다. 이때 4명이 팀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어요. 개별적으로 자문했던 것으로 압니다. 공.사조직을 거느렸던 YS.DJ 때완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이후 노 대통령이 민주당 대선 후보로 확정되면서 서동만 상지대 교수가 주도적으로 일을 했습니다. 신분으로 볼 때 윤 전 장관, 이종석 차장, 서주석 실장은 모두 공개활동을 하기가 곤란했어요. 그래서 서 교수가 총대를 멜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 4명밖에 안된 것은 다른 사람들이 노 캠프에 오는 것을 기피한 것과 관계가 있습니다."

◆"이라크와 북한에 대한 동시 전쟁 가능"=미국의 초기 북핵 대응은 들쭉날쭉했다. "다자로 해결한다""북한과 대화는 하되 협상은 않는다"는 원칙만 되풀이했다. 당국자들 발언도 춤을 춘다. 이에 대해 부시 행정부의 전직 고위 정보관계자 E씨가 최근 본지에 밝힌 내용.

"부시 행정부의 북한에 대한 관심도는 극히 낮았습니다. 동아시아 전문가들이 즐비하게 포진하고 있지만, 핵심 그룹인 네오콘(신보수주의자)의 대북 불신이 워낙 깊은 것과 관련이 있지요. 그래서 북한 문제를 심각하게 다루려고 하지 않았지요. 한마디로 아무런 계획도,전략도 없었습니다. 미국 특사단 방북(2002.10월)에서 이라크전(2003.3) 까지 부시 행정부의 핵심 인사에게 이라크가 '전쟁의 대상'이었다면 북한은 '정치의 대상'이었죠. 부시 행정부는 이라크에 모든 것을 쏟고 또 중시하는 분위기였습니다."

미국의 대응은 이렇게 전개된다. 2002년 12월 24일. 미 국방부.도널드 럼즈펠드 국방장관이 기자회견장에 나타났다.

"미국은 대테러및 이라크 전쟁, 대북 전쟁을 동시에 추구할 수 있습니까."(질문)

"그렇습니다. 우리는 필요한 것들을 완벽하게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답변)

12월 29일. 부시 행정부 당국자들이 대북 '맞춤형 봉쇄' 얘기를 꺼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의한 대북 경제제재, 북한의 미사일 수출 선박 나포, 주변국의 대북 경제교류 감축이 그 내용이었다.

그러나 해가 바뀌면서 미국의 태도는 다소 유연해진다. 2003년 1월 9일. 파월 국무장관은 워싱턴 포스트와의 기자회견에서 "북한을 공격할 계획이 없다는 공식 보장을 해줄 수도 있다"고 말했다. 북한이 요구해온 불가침조약 체결에 대한 대답이었다.이 시기 온건파인 파월이 전면에 등장하고,북핵 해법의 일단을 내비친 것은 북한에 대한 유화제스처로 해석된다. 부시 대통령도 1월 15일 "북한이 핵을 포기하면 에너지와 식량 지원에 관한 과감한 조치를 시작할지를 검토할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2월들어 미국의 태도는 다시 강경으로 돌아섰다. 부시 대통령은 8일 "모든 선택방안이 테이블 위에 놓여 있다. 하지만 이 문제를 외교적으로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고 말했다. E씨의 이어지는 설명.

"북한의 고농축 우라늄 핵개발 계획 시인은 결과적으로 행정부 내 강경파들의 입지만 강화시켜주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그런 점에서 북한은 오판을 했던 셈이지요. 당시 행정부 내에서는 북한을 회유하거나북한과 거래한다는 투의 얘기는 꺼낼 수도 없는 분위기였습니다.그런 식의 발언자는 금세 따돌림을 당했죠."

이런 가운데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2월 12일부터 장장 50일간의 잠행에 들어갔다. 그는 이때 중대 결정을 내린다.미국의 이라크 개전 직전이었다.

오영환 기자.정용수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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