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세를 준비하자] 5. 노년을 풍요롭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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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30년 전인 1971년 문공부장관을 지냈던 윤주영(74)씨는 현역 사진작가다. 서울 여의도 오피스텔에 작업실을 마련한 윤씨는 다음달 개최할 사진전에 내놓을 작품을 고르느라 요즘 분주하다.

"생활과 생존은 다른 거예요. 생활을 해야지 생존만 해서는 안됩니다. 그냥 살아 숨쉬는 생존이라면 아무리 오래 살아도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자신이 하고 싶은 활동을 하면서 살아가는 생활이 가능해야 진짜 산다는 의미가 있지요. "

윤씨가 자신의 삶을 '생활' 로 자부하는 것은 물론 사진 덕분이다. 79년 관직에서 물러나면서 우연히 들게 된 카메라. 사진은 그에게 '제2의 인생' 이 됐다. 십여회의 사진전과 작품집, '현대사진문화상' 과 일본 '이나노부오 사진상' 등 각종 수상 경력은 그 성과들이다.

창작을 통해 풍요로운 삶을 누리고, 또 노년에 들어서 심미안이 생겼다는 게 윤씨의 주장이다.

고려대 가정의학과 조경환(43)과장은 "다른 기능과 달리 문화예술과 관련된 창작력이나 종합적인 판단력의 경우 노년에 오히려 더 발달한다" 고 말했다. 두뇌의 여러 기능 중 계산능력이나 기억력과 같은 '결정형 기능' 은 장년기에 들어서면서 급격히 떨어지는 반면 창작이나 종합적인 상황판단과 같은 '유동형 지능' 은 노년에 최고조에 이른다는 것이다.

숙명여대음악치료대학원(http://sookmyung.ac.kr/~mtherapy) 최병철 교수는 "창의적인 활동은 무엇보다 노년의 삶을 안정되게 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고 강조한다.

최교수는 "노인들이 신경질이 잦은 것은 무력해져가는 자신에 대한 불안과 초조함의 일종인데, 창의적 활동은 자신의 존재에 대한 자긍심을 높여줘 긍정적인 생활을 가능하게 한다" 며 "특히 아마추어 차원의 클래식감상이 쉬우면서도 좋은 방법" 이라고 말했다.

그런 점에서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의 터줏대감 노인환(67)씨는 자원봉사와 클래식 감상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은 경우다. 부인과 사별하고 사업을 정리한 노씨는 98년 예술의 전당 자원봉사자로 지원해 새로운 삶을 살고 있다.

직접적인 창작활동뿐 아니라 각종 문화행사나 문화공간을 자주 접하며 노년의 여가를 선용하는 것은 초고령 사회에서 노인들의 삶을 활력있고 풍요롭게 하는 윤활유가 될 수 있다.

문제는 이처럼 문화예술을 즐기는 사람이 아직까지 많지 않다는 점이다.

공주대 음악교육과 이주경 교수는 "노인들이 평생 즐길 수 있는 클래식의 경우 많이 듣는 훈련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며 "그러나 어려서부터 교회나 마을단위 연주회에서 클래식을 자주 접하는 서구와 달리 우리나라 성인들의 경우 성장과정에서 제대로 된 공연을 보고 들을 기회가 거의 없었다" 고 지적한다.

따라서 우리 사회도 문화활동이나 문화공간을 자주 접할 수 있는 기회의 폭을 넓히고 어릴 적부터 문화적인 소양을 기르는 스스로의 노력과 준비가 절대 필요하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제도적인 차원의 재교육 프로그램도 시급하다.

김종환(음악교육학)박사는 "선진국의 경우 이미 19세기부터 사회보장 차원에서 성인을 상대로 한 문화예술 재교육을 했다. 우리는 이같이 '삶의 질' 과 직결된 문제를 그동안 너무 등한시해왔다" 며 재교육 프로그램의 활성화를 강조했다.

노인을 위한 전국순회 공연을 하고 있는 재단법인 '정동극장' (http://www.chongdong.com) 김영욱 운영팀장은 "노년층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문화공간을 확충하고 각종 문화예술 프로그램을 지원해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도록 유도해야 할 것" 이라고 제안했다.

오병상 기자

사진=최정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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