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아침] 오탁번'너무 많은 것 가운데 하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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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스무살 무렵

내 사랑은 설레이는 금빛 노을이었다.

비가 내리고

눈이 쌓이고

서른살 무렵

내 사랑은 희미한 꿈결 속을 서걱이는

가랑잎이었다.

속절 없는 바람이 불고

바람 위에 매운 바람이 불고

이제 사랑은

삶보다 어렵고 한갓 쓸쓸할 뿐,

어느 쓰라린 어둠 속

한 덩이 빛나는 슬픔으로

내 사랑은 운석(隕石)처럼 묻혀 있을까.

- 강인한(1944~) '어떤 사랑 이야기'

이 세상에 태어나 한번도 사랑을 가져보지 않고 죽는 사람이란 없다. 그 나이 스무살 때 사랑은 금빛 노을이었는데 서른살 무렵의 사랑은 가랑잎이다. 아마도 전자는 모든 희망에 대한, 후자는 절망하는 자에 대한 사랑이었으리라.

그러나 그의 진정한 사랑은 노년에 접어든 지금에 비로소 완성되었다. 그의 가슴 속에 깊이 자리하여 생을 인도하는 하나의 값진 슬픔(운석)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생의 가장 고귀하고도 아름다운 가치, 그것을 일러 시인은 '사랑' 이라는 이름으로 불렀을지도 모른다.

오세영(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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