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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위기 불감증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위기(危機)를 뜻하는 영어 단어 크라이시스(crisis)는 그리스어 크리네인(krinein)에서 왔다. 판단하고 결정한다는 의미와 함께 분리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원래 크리네인은 갑작스럽고 결정적인 병세의 악화를 가리키는 의학용어로 사용됐다.

보통 이런 상태에 이르게 되면 의사는 환자의 소생 가능성을 판단하게 되는데 의사가 회생 가망이 없다고 결정하면 결국 환자는 생명에서 분리되는 절차를 밟게 된다. 어원적으로 볼 때 위기라는 단어에는 생사가 달린 중대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절체절명의 전환국면이라는 함의가 내재돼 있다.

심리학자들은 위기상황에서 사람들은 보통 부인.분노.체념의 3단계 반응을 보인다고 설명한다. 처음에는 위기라는 사실 자체를 부인하는 반응을 보이지만 위기가 확실해지면서 분노를 표출하는 단계로 옮겨가게 된다. 그러나 위기가 지속되면서 결국 체념으로 바뀌고 무력증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롤러코스터 효과로 위기불감증을 설명하는 학자들도 있다. 롤러코스터를 타고 공중제비를 돌 때 처음에는 무섭지만 횟수를 거듭할수록 공포감이 사라지듯 위기도 반복되면 느낌이 무뎌진다는 것이다. 마침내는 위기가 와도 위기로 느끼지 못해 중요한 결정과 판단을 제때 못내리는 아노미 상태에 빠지게 된다.

요즘처럼 위기라는 말을 자주 쓰던 때도 없었던 것 같다. 당장 의보재정에 생긴 구멍으로 건강보험이 위기고, 무너진 공교육으로 학교교육이 위기다. 도덕불감증이 만연하면서 가정과 사회가 위기고, 세무조사와 집안싸움으로 얼룩진 언론도 위기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변할 줄 모르는 정치권은 또 어떤가.

부시 행정부의 등장으로 햇볕정책도 위기를 맞고 있고, 엔저(円低)비상이 걸리면서 수출도 위기다. 서울대 교수의 84%가 심각한 위기라고 말할 정도로 국내 최고대학이라는 서울대도 위기다. 시도 때도 없이 공중제비를 돌다보니 정신이 얼얼해져 분노의 단계인지, 체념의 단계인지 분간조차 잘 안된다.

예고 없이 오는 것이 위기지만 전조(前兆) 없는 위기는 없다. 개인이든, 조직이든 위기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문제는 전조를 얼마나 미리 잘 포착해 대비책을 마련하느냐에 있다. 미국 기업을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위기관리 시스템을 갖춘 기업의 위기극복 성공률은 그렇지 못한 기업의 2.5배라고 한다. 위기 그 자체보다 더 무서운 건 위기불감증이다. 위기관리론을 주장하는 학자들의 일치된 견해다.

배명복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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