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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의 명인] 장도장 박용기씨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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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6면

"장도(粧刀)에는 절개(節槪)뿐 아니라 충효사상이 담겨 있지요. 사대부집에서는 아들이 성인식을 하거나 딸이 시집갈 때 장도를 주었어요. "

장도장 박용기(朴龍基.71.전남 광양시 광양읍 구산리.중요무형문화재 제60호)씨는 양반제도의 몰락과 일제의 탄압으로 장도가 자취를 감추고 광양에서만 겨우 명맥을 유지하는 게 아쉽다고 말한다.

조선후기 사대부 남자들이 장도를 많이 차고 다닌 것은 "당쟁이 심하다 보니 술자리에 초대받았을 때 술에 독약이 들어갔는지 검사하기 위해서 였다" 며 그는 "남자의 장도는 가슴에 품었던 여성용과 달리 크고 은젓가락을 부착한 것이 특징" 이라고 설명한다.

장도는 만드는 데 여러 과정을 거친다. 불에 달군 쇠를 망치로 두들겨 칼날형을 잡고 줄로 간 후 숯돌에 문지른다. '일편심(一片心)' 이라는 문양을 칼날에 새겨 숯불(섭씨 8백도)에 담금질을 하면 칼날이 완성된다. 칼자루는 대추나무.흑시(감나무).우골(牛骨) 등으로 제작하며 옥돌은 이 분야의 장인에게 의뢰한다.

박씨는 부잣집 7남매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공부보다 공작에 관심을 더 가졌을 정도로 손재주가 있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이웃에 살던 고종 사촌누님의 친척인 장익성씨를 찾아가 장도 만드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월급도 없었다. 1년 만에 장도를 만들 수 있게 되면서 용돈을 받아 쓰게 됐는데, 월급을 받으며 작업하는 지금의 전수생과 비교하면 당시의 작업환경은 열악했다.

예전에는 가르치고 배우는 사제(師弟)관계였지만 지금은 월급을 주고받다보니 '사장' 으로 불리는 노사관계로 변해 5년 정도 돼야 겨우 장도를 만들 정도로 느슨해졌다고 말한다.

박씨는 "중요무형문화재 중 예능계통은 스승에게 강습료까지 지불하면서 배우는데 공예계통은 오히려 월급을 줘야 할 정도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며 "정부는 잊혀져 가는 우리 문화를 살리기 위해 장인정신을 강조하지만 (무형문화재에 선정된 장인들이) 직업 전환을 고려할 정도로 푸대접을 받고 있는 것이 현실" 이라고 한탄한다.

후손에 물려줄 장도박물관을 만드는 것이 박씨의 마지막 꿈이다. 현재 2백60여평의 개인 땅과 자신의 작품을 광양시에 기부체납해 박물관사업을 추진중이다.

"이 시대를 살면서 은장도에 담긴 뜻과 정신을 이어가야 문화가 제대로 서고 경제도 산다" 고 말하는 박씨에게서 잊혀져 가는 우리의 전통문화가 한껏 숨쉬는 듯 보였다. 문의 061-762-6007.

광양=김세준 기자

◇여행쪽지

봄철 광양을 대표하는 꽃으로는 매화를 손꼽을 수 있다.연분홍 매화꽃으로 유명한 ‘섬진마을(광양시 다압면 섬진리)’은 광양시내에서 40여분 거리에 있다.수천그루의 매화나무를 조성한 청매실농원(061-772-4066)은 봄이면 매화의 요염한 자태를 감상하러 오는 관광객들로 붐빈다.

섬진마을에서 30여분 거리에는 샛노란 산수유가 곱게 수놓고 있는 상위마을(전남 구례군 산동면 위안리)이 있다.노란 물감을 풀어놓은듯 계곡과 돌담사이에 산수유가 흐드러지게 피어있어 많은 상춘객들의 발길이 이어진다.지리산 온천랜드(061-781-1414)에서 온천욕을 즐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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