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다석과 씨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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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내가 이번에 오산 왔던 것은 함 자네 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였던가 봐. "

함석헌(咸錫憲.1901~1989)이 오산학교 재학시절의 교장 다석(多夕)유영모(柳永模.1890~1981)에게 들었다는 말이다.

탄생 1백주년을 맞아 재조명 작업이 활발히 일면서 그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쳤던 다석에 대한 관심도 고조되고 있다.

"오르려고 하는 사람은 깊이 숨어야 한다. 숨는다는 것은 더 깊이 준비하고 훈련한다는 것이다" 며 다석은 동서양 고전 다 아우르며 묵묵히 참 나이며 참 생명인 '씨알' 을 찾아나갔다. 이런 스승의 사상을 사회운동가로서 전파한 사람이 함석헌이다.

"씨알의 '알' 의 ㅇ은 극대 혹은 초월적인 하늘을 표시하는 것이고,.은 극소 혹은 내재적인 하늘 곧 자아를 표시하는 것이며, ㄹ은 활동하는 생명의 표시" 라는 함석헌의 '씨알' 의 설명은 다석에게서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

다석은 씨알은 하느님의 아들인 정신으로서의 나와 수많은 민초인 육체로서의 나를 말한다고 했다.

씨알 정신은 자유의 진리정신과 평등의 서민정신이 하나를 이룬 것이다. 여기에 역시 다석에게서 영향받은 무교회주의가 덧보태지며 함석헌의 사상은 사회변혁운동으로서의 추진력을 얻는다.

"무교회 신앙은 영원히 체계를 이루지 말자는 것이다. 현실을 무시하는 이상주의자라는 비난을 들으며 인간수업이 부족한 편협한.조야한이라는 욕을 들으면서라도 고정화하려는 시류에 반항하자는 것이다. "

교회 체제를 부정하는 무교회주의에서 함석헌은 자유하는 프로테스탄트로서 "청년성을 영원히 가지자" 고 주장하며 민중에게로 뛰쳐나와 민주화운동의 어른이 됐다.

함석헌을 기리는 한 칼럼에서 고은시인은 "각자가 만들어낸 에고이즘 갑옷을 입은 농성체제들은 마치 내일이 없는 것처럼 지리멸렬이다" 며 작금의 현실을 개탄했다.

류동민 교수는 진보주의자임을 자처하면서 "권력에 대한 비판 그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권력으로 형성되려는 불길한 조짐을 곳곳에서 발견하곤 전율한다" 고 토로했다.

"개인의 자유와 자발성에 기초하지 않은 집단주의적 행동은 그 추진 주체의 선의와 무관하게 비극적인 결과를 가져온다" 는 우려다.

이러한 때 드높은 정신적 주체와 민초를 함께 아우르면서 어떠한 집단화.권력화를 거부할 영원한 청년정신으로서의 '씨알' 들은 남아 있기나 한 것인가. 다석같이 숨어 침묵하며 준비하고 있는 것인가.

이경철 문화부장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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