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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희 대기자의 투데이] 한미정상회담 이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한.미 정상회담의 결과에 대한 평가를 둘러싼 혼란을 잠재우려는 듯 김대중(金大中)대통령 자신이 기발한 평가기준을 제시했다. 金.부시회담 내용을 남북관계와 북.미관계로 나눠 점수를 매겨보자는 것이다. 순발력 있는 발상이다.

金대통령은 귀국보고에서 북.미관계의 부분은 "앞으로 계속 논의가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는 한마디로 간단히 끝내버렸다. 보고거리가 없다는 것이다. 남북관계에 관한 토의결과의 설명은 길다. 부시 대통령이 햇볕정책의 성과와 남북문제에 있어서의 한국의 주도권을 인정하고 2차 남북 정상회담을 지지했다는 것이 金대통령이 전하는 한.미 정상회담의 남북관계 부분의 성과다.

사실 지난해 11월 대통령선거 때부터 한국 햇볕론자들의 애를 태운 부시진영의 대북 강경론과 부시정권 출범 후 그의 외교안보팀 사람들의 잇따른 북한 비판론을 고려한다면 부시가 햇볕정책에 대해 원칙적인 지지를 분명히 한 것은 작은 성과가 아니다. 제네바합의를 유지하고 지키자고 확인한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金대통령 방미의 가장 큰 목적이 무엇이었던가를 생각하면 이야기는 다르다. 긴 말 할 것 없이 金대통령은 부시를 설득하러 갔다. 김정일(金正日)위원장은 북한의 경제를 살리는 개혁.개방을 위해서 남한은 물론이고 미국과도 관계개선을 갈망하고 있으니 클린턴 행정부의 정책을 계승해서 북한과 협상을 하라고 권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金대통령은 부시 설득에 실패했다. 부시는 오히려 金대통령에게 북한과의 교섭에서는 실용주의적.현실주의적 자세를 지키라고 충고했다. 두 대통령은 첫 대면에서 김정일의 신뢰문제에 관해서는 합의를 볼 수 없다는 데만 합의를 본 것이다.

金대통령의 불운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金대통령은 부시가 완강하게 주장하는 대북교섭의 상호주의를 받아들여야 했다. 金대통령은 미국의 엄격한 상호주의에 대신할 신축성 있는 "포괄적 상호주의" 를 제시했다. 그러나 포괄적 상호주의라도 그것을 지키자면 대북협상의 입지는 좁아질 것이다.

워싱턴의 분위기를 읽은 金대통령은 서울 평화선언의 꿈도 접어야 했다. 노벨평화상은 한반도 평화를 위한 협상을 진전시키라는 기대를 담고 있다. 평화선언이나 평화협정은 그런 기대에 맞는다. 그러나 한반도평화에 관한 조치는 주한미군의 지위와 직결된다. 미국의 동의 없이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金대통령의 계산은 어디서 차질이 났는가. 미국쪽의 준비부족을 과소평가했다. 金대통령의 워싱턴 체류 중에 부시 행정부 사람들이 보인 혼란은 참으로 가관이었다. 같은 날 나온 국무장관의 발언과 백악관 안보보좌관의 북한정책에 관한 발언이 충돌하고, 같은 국무장관의 말이 사흘동안 온건과 강경을 오락가락 했다. 金대통령은 대북정책을 둘러싼 부시 행정부 내부의 초기 노선투쟁의 희생자가 된 것이다.

金대통령은 또 부시의 북한 불신의 심리적 유전인자를 몰랐다. 1991년 말 노태우(盧泰愚)정부는 핵부재선언, 92년 초 북한과 한반도 비핵화공동선언을 했다. 거기에 따라 아버지 부시는 한국에서 전술핵무기를 철수했다.

북한이 비핵화선언을 비웃듯 핵무기개발을 계속한 사실은 곧 밝혀지고 아버지 부시는 북한에 대한 배신감에 분노했다. 정치연령으로 볼 때 아버지가 느낀 북한 불신은 아들 부시에게 지워지지 않는 '유아체험' 으로 유전됐을 것이다.

아닌게아니라 金대통령은 혹 떼러 갔다가 혹을 하나 더 달고 돌아왔다. 상호주의와 검증과 투명성의 혹이다. 그렇다고 한.미 정상회담이 실패하고 햇볕정책이 좌초할 위기에 몰린 것은 아니다. 부시의 거칠고 직설적인 말과 그의 외교안보팀 사람들의 발언은 앞으로 확정될 대북정책에 더러는 반영되고 더러는 반영되지 않을, 정제되지 않은 생각의 편린(片鱗)들이다. 미국의 대북정책이 확정될 때까지 진행될 많은 협의가 이제 시작된 것이다.

부시 행정부가 결국은 포용정책을 계승할 것인가를 주시하면서 동시에 북한이 과민반응을 보이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장관급 회담의 돌연 연기가 그런 경우가 아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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