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외환·외자·외곬인생 40년 (34)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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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34. "은행장은 합승 잘해야"

1983년 7월 나는 경제기획원 차관을 그만 두고 외환은행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 때 내 나이 마흔아홉이었다. 막바로 은행에 들어간 친구들 중에는 본점 부장을 하고 있는 사람도 드물 때였다.

이 자리에 내가 얼마나 있을 수 있을까□ 나는 전임자들의 재임기간을 조사해 '평균수명' 을 뽑아 보았다. 한두달만에 자리에서 물러나는 일은 없겠지만 평균수명을 초과해 재임한다는 보장도 없었다. 초조하게 생각할 일이 아니었다.

잠정적인 수명을 정하고 나니 '반환점' 이 눈에 들어왔다. 갑작스런 전직이었지만 나는 충분히 준비한 뒤 본격적으로 업무에 착수하기로 마음먹었다. 기발한 아이디어로 한건 하거나 오랜 숙원사업을 여봐란 듯 해결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지 않기로 했다. 전임자들이라고 몰라서 못했을 리가 없었다.

그들이 못했을 땐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업무 내용이 완전히 바뀌었지만 업무 브리핑을 사절했다.

궁금한 게 있으면 따로 물어 보겠다며 브리핑 자료를 두고 가라고 했다. 브리핑이란 본래 보고하는 사람이 하고 싶어하는 얘기 위주로 내용을 구성하기 마련이다.

실정도 잘 모르고 사람도 장악하지 않은 상태에서 하고 싶어하는 얘기만 듣다가는 자칫 실패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대신 누구든지 행장실을 드나들 수 있도록 하고 걸려오는 전화를 모두 받았다.

나는 또 국영 은행장으로선 이례적으로 선배 격인 시중은행장들을 예방했다. 그때 한 은행장이 내게 엉뚱한 질문을 했다.

"합승(合乘)이란 말 아십니까?"

"네?"

"부실기업인 줄 알고도 그 회사 돈을 먹는 골빈 은행원은 없습니다. 부실기업이란 회사도 한때는 예금을 갖다 주고 신용장을 들고 오던 우량 고객들이었죠. 그런 회사들이 잘나갈 때 돈을 싸들고 오는 것은 다급하면 믿을 곳이라곤 '노' 라고 못할 자기 돈 먹은 은행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은행장은 합승을 잘해야 합니다. 탈이 안 날 회사를 잘 골라 타야죠. "

이야기 끝에 그는 "돈 문제에 대해 너무 까다롭게 굴면 고객이 다 달아난다" 고 귀띔했다. 그 후 부실기업을 정리할 때 생생하게 겪었지만 그 시절 일부 기업가들은 돈을 안 받으면 중상모략을 하고 그래도 안 통하면 자기가 믿는 은행을 찾아 떠나곤 했다.

그때 왜 그런 얘기를 해 주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지금도 그 은행장에 대해 고맙게 생각한다. 어쩌면 관료 출신에 은행 일에 미숙한 내가 유력한 자리에서 밀려나 은행장 노릇을 제대로 할 수 있을지 딱해 보였는지도 모르겠다. 그 1주일 전 김준성(金埈成)부총리에게 퇴임 인사를 하러 갔을 때 그 역시 의미심장한 얘기를 했다.

"은행이란 돈을 만지는 곳이라 아무리 받지 말라고 해도 돈 받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오. 그렇더라도 은행장만 안 받으면 그 은행은 탈이 안 생깁니다. 내 말을 명심하시오. "

그는 입각 전 제일은행.외환은행 등 3개 은행장을 지냈고, 산업은행 총재에 한국은행 총재까지 지낸 인물이다.

고객을 놓치지 않는 것도 좋지만 돈을 받기 시작하면 감당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합승을 잘해 한동안이야 쾌속 질주를 할 수도 있겠지만 잘못했다가는 교통사고가 날 게 뻔했다.

한달이나 지났을까, 돈을 싸들고 왔던 기업들 가운데 부실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했다. 김준성 전 부총리에 대해 나는 지금도 고맙게 생각한다. 외환은행장 시절 나는 국내에선 처음으로 은행에 융자위원회와 인사위원회 제도를 도입했다.

정인용 前경제부총리

정리〓이필재 이코노미스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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