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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삶의 향기

패자와 2인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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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남의 승리를 흔쾌히 인정하고 손을 들어주기란 쉽지 않다. 누군가에게 졌다는 걸 받아들이지 못해 패자는 승자를 깎아내리고 이유를 만들어 낸다. 심판 때문에, 잠깐의 실수 때문에, 나빴던 컨디션 때문에. 그리고 ‘만약’으로 시작되는 회한이 뒤를 이으며 스스로를 진짜 패배자의 틀에 가둔다. 하지만 김연아를 비롯한 우리의 승리들을 보면, 진정한 실력은 모든 것을 뛰어넘는다. 누구에게나 패배의 순간은 한번쯤 오게 마련이다. 성공과 실패의 갈림길은 패배라고 느낀 그 순간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달린 것 같다. 승자를 인정하고 그와의 차이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자기가 가야 할 방향과 승리의 길이 눈에 들어온다.

그런 의미에서 김연아가 이토록 위대한 승리를 거둘 수 있는 건 패배의 순간을 다스린 지혜에 있지 않을까 싶다. 김연아에게 진심으로 놀랐던 장면은 2008년 세계선수권대회에서였다. 2007년 쇼트에서 세계 신기록을 세우고도 부상 때문에 프리에서 넘어져 3위를 했었다. 여전히 부상 중이었지만 2008년엔 완벽에 가까운 프리 연기를 펼쳤다. 이번에는 우승이 당연해 보였다. 그런데 스코어보드에 이상한 점수가 떴다. 돌이켜보면 그 대회는 아사다 마오가 점프 직전에 넘어져 10여 초를 정신을 차리지 못했는데도 우승을 차지한 이상한 대회였다. 납득할 수 없는 점수에 김연아는 한동안 넋을 잃은 듯했다. 얼굴은 벌게지고 입은 다물어지지 않았다. 팬들은 그가 일어나서 “이건 말도 안 돼!”라고 소리라도 질렀으면 싶었다. 그런데 몇 초나 흘렀을까. 김연아는 낙담의 빛을 곧 거둬들이고 빨간 볼을 손으로 감싸며 미소를 짓기 시작했다. 이해되지 않는 패배의 순간을 그렇게 이겨내는 열일곱 소녀의 모습에서는 득도의 경지에 다다른 사람의 기운이 느껴졌다. 그는 항상 “3위도 잘한 것이다” “ 누구를 이기기 위해서 스케이트를 하는 것이 아니다”고 말했고 올림픽 직전까지 이어진 부당한 판정에도 한마디 불평도 없었다. 그리고 아무런 설명도 필요 없는 승리를 거뒀다. 패배란 이렇게 극복하는 것이다.

상대적으로 아사다 마오의 올림픽 이후의 모습은 많이 아쉽다. 시즌 내내 저조하던 그는 최선의 훌륭한 연기를 보여줬다. 그러나 그의 베스트는 김연아를 이기기 위해선 너무나 부족했다. 아름다운 승부였다. 그런데도 경기가 끝난 뒤 금메달을 아깝게 놓친 것처럼 말하며 스스로를 못난 패배자의 프레임에 가두고 있다. 그는 당당한 세계 2위가 아닌가. 자신을 멋진 2인자로 만들 것인가 아니면 못난 패배자로 만들 것인가는 본인에게 달렸다. 그건 그냥 이미지 메이킹의 문제가 아니라 다음 단계의 성공의 열쇠를 쥐느냐 그러지 못하느냐의 문제인 것 같다.

이윤정 문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