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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불교 세속화에 맞서 한국 근대 불교의 새벽을 열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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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호 31면

한국 근대 불교의 산실인 대각성전과 범종각이 종묘숲을 배경으로 한옥과 어울려 있다. 용성이 거주하던 1층 한옥을 헐고 1987년 신축했다.

지하철 1, 3호선이 교차하는 종로3가역 근처 대각사(大覺寺)는 근대 불교의 상징이다. 솔바람 부는 깊은 산중의 고즈넉한 풍경소리를 도심의 훤소(喧騷)가 대신한다. 솔바람 풍경소리가 본래부터 있던 것이 아니고 중생들이 얽어매어 놓은 그물망과 소음 또한 공(空)하기는 일반이라던가.

사색이 머무는 공간<31> 서울 봉익동 대각사

굴지의 페인트 회사(삼화페인트) 사옥의 사잇길로 걸어 들어간다. 그야말로 색(色)을 만들어내는 곳이다. 안팎으로 색칠하며 살 수밖에 없는 세상에서 그 어느 색깔에도 물들지 않는 질박한 정신은 가능한 것일까. 차라리 때를 묻히고 모든 색깔을 받아들여 더 이상 더러워질 수 없는 경지에 다다른다면 어떨까. 그리하여 마침내 한 송이의 연꽃으로 피어나 향내를 줄 수 있다면 인환(人寰)의 거리가 차라리 수승한 선원(禪院)일 수 있다.

한옥마을과 종묘 틈바구니에 낀 대각사. 정문 입구 오른쪽 표지석은 이곳이 3·1운동 민족대표였던 백용성(白龍城:1864∼1940) 스님이 거주한 곳임을 일깨운다. 용성이 거주하던 단층 기와집은 헐리고 지금은 현대식 3층 건물이 들어서 있다. 용성은 만해 한용운과 함께 한국 근대 불교의 새벽을 연 선각자다. 안광이 호랑이처럼 번뜩였던 그는 조선조에 가뜩이나 위축된 불교가 일제의 농간으로 왜색(倭色)에 물들어갈 때 분연히 떨쳐 일어나 빳빳하고 올곧은 종풍을 정립한 선객이자 사상가였다. 용성이 없었다면 오늘날 한국 조계종단이 없었다는 말은 빈말이 아니다.

<2> 2000년에 전북 장수 죽림정사 내에 복원된 용성의 생가. 본채와 아래채로 된 목조 기와집이다. <3> 백용성 스님의 생전 모습 <4> 대각 일요학교에서 찬불가를 연주할 때 사용된 풍금. 용성은 서양식 찬불가인 왕생가. 권세가 등을 작시, 작곡했다. 신동연 기자

조선왕조 내내 탄압을 받아왔던 한국불교는 나라가 깨지고 일제 식민지로 전락하면서 일본식 세속화 전략에 길들여져 갔다. 스님이 결혼을 하고 고기를 먹으며 사찰 정재(淨財)를 삿되게 쓰는 지경에 이르렀다. 비구승 9할이 취처(娶妻)했다는 기록이 있다.

300여 년 동안 계속되었던 승려 도성 출입 금지령이 1895년에야 해제되었다. 푸른 눈의 선교사들에 의해 1876년부터 개신교가 물밀 듯이 들어온 것에 비하면 불교의 포교활동은 상대적으로 뒤늦은 편이었다.

유교경전을 읽던 신동은 14세에 출가해 해인사·보광사·송광사 등에서 용맹 정진한다. 부처의 정법을 오롯이 잇고 멀리 숙종 때 환성지안(喚醒志安:1664~1729) 조사를 원사(遠嗣:동시대인이 아니라서 직접 배우지 못하고 정신으로 계승)했노라고 당당히 선언한 선객 용성은 산중생활을 청산하고 1911년 2월 그믐께 상경한다. 중생 속으로 뛰어든 것이다. 당시 사대문 안의 유일한 사찰 각황사(覺皇寺:현재 조계사)를 거쳐 신도의 집에서 도시 포교를 시작한다. 이것이 민가 포교당의 효시로 보인다. 봉익동 민가를 절집으로 바꿔 대각사를 창건한 것은 그 직후라고 한다. 궁중 상궁들의 도움이 컸다.

1912년 범어사·통도사 등이 연합해 서울 대사동(인사동)에 조선 임제종 중앙포교당을 여는데 이때 한용운이 주무를 담당하고, 백용성은 포교 책임자가 돼 설교했다. 서울 시민들에게 처음으로 참선(參禪)의 개념을 심어주는 계기가 된다. 이런 인연으로 백용성과 한용운은 훗날 3·1운동 때 불교계 대표 2인으로 나란히 참여한다. 3·1운동 때 태극기 사용을 제안한 이가 바로 용성이다. 한용운은 ‘흰 바탕에 푸른색 한반도 기를 사용하자’고 제안했고 천도교와 개신교 대표들은 무방하다는 입장을 보였다고 한다.

“열반의 경지인 무극(無極)은 체(體)가 되고 태극(太極)은 상(相)이 되며 음양(陰陽)은 용(用)이 됩니다. 천도교의 인내천(人乃天) 한울이 태극인 것이며, 기독교의 천국이 곧 태극입니다. 그러므로 태극기를 사용해야 합니다. 반도기를 사용하면 고구려와 발해의 옛 땅을 포기하는 선언이 되는 것입니다.”

통섭의 사유방식을 지닌 용성의 탁견이 주효했다. 그의 이런 인식은 나중에 가야와 고구려·백제·신라의 불교 초전 성지를 복원하고, 해외 성지를 조성하고, 선한 이와 악한 이를 가리지 말고 불제자로 받아들이라는 유훈으로 남는다.

용성 문도들 사이에서는 상식이지만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비화(秘話)가 있다. 그날 태화관에서 민족대표 29인이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할 때 용성은 시자 태현(훗날의 동헌)과 기생들에게 대표들의 두루마기와 신발을 감추게 했다. 때 맞춰 헌병대와 종로경찰서에 알려서 모두가 체포되었고 그 파장으로 삼천리강산에 만세운동이 물결치게끔 방편을 썼다. 선승이지만 큰일을 도모하고 성사시킨 용성은 사업수완도 탁월했다. 사원 경제의 자립화를 위해 함경남도 북청에 금광을 열기도 했다. 수익금은 독립자금으로 쓰였다고 한다.

서대문 감옥에서 용성은 충격을 받는다.
“각각 자기들이 신앙하는 종교서적을 청구하며 기도했다. 그때 내가 열람해보니 모두 조선글로 번역된 것들이었다. …통탄하여 원력을 세웠다. 출옥하면 즉시 동지를 모아 경전 번역 사업에 진력하여 진리의 나침반을 지으리라.”

기독교 성경과 천도교 경전은 모두 한글판인데 그때까지 유독 불교경전만은 어려운 한문으로 돼 있었던 것이다. 이래서는 대중화가 불가능했다. 출옥한 용성은 동지를 모았으나 모두 반대하고 비방했다. 1921년 용성은 삼장역회(三藏譯會)를 조직했다. 당시 동아일보는 사설에서 ‘불교의 민중화 운동’이라며 호응하고 있다. 『조선글 화엄경』은 세종대왕도 하지 못한 치적으로 꼽힌다.

용성의 현대불교 사업은 어린이 포교, 일요학교 설립, 시민선방 개설과 생활선(禪) 주창으로 이어진다. 대각사 용성선원에서 선의 대중화시대를 연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참신한 발심은 직접 풍금을 치면서 작사·작곡한 찬불가를 불렀던 일이다.
‘곧게 자란 솔나무는/그림자도 굽지 않고/빈 곳에 메아리는/소리 좇아 대답하오.’

작은 풍금 앞에서 ‘왕생가’를 연주하며 노래하는 선객을 상상하면 미소가 배어나온다. 맹호출림(猛虎出林) 격으로 산림을 나온 용성은 선기(禪氣)를 드날리며 중생과 더불어 시대와 함께 불도를 펼쳤다. 중국 지린에 해외 포교당도 세웠다. 함양 백운산에 화과원(華果院)을 열고 농사일하면서 참선 수행하는 선농(禪農) 불교도 실천했다. 이런 모든 활동은 제도권 내에서의 개혁운동이었다.

그러다 1927년부터는 대각교(大覺敎)를 선언하고 독자노선을 열어나가게 된다. 1926년 5, 9월 두 차례에 걸쳐 총독부에 승려가 아내를 얻고 고기를 먹는 행위를 반대한다는 건백서(建白書)를 냈지만 거절당했다. ‘곡식으로부터 나와서 곡식을 해침은 벌레요, 불법(佛法)으로부터 나와서 불도를 해치는 자는 중[僧]’이라며 계율을 엄격히 지킬 것을 천명했다. 이는 『조선불교유신론(朝鮮佛敎維新論)』을 쓴 한용운의 불교 개혁안과는 변별점이 뚜렷하다. 일찍이 일본에 다녀온 한용운은 승려의 결혼을 강력히 주장한 바 있다.

한국불교가 용성의 빳빳한 종지를 체 받지 않고 한용운의 개혁안대로 흘러갔다면 오늘날 조계종의 종풍은 무너져 버리고 일본식 불교로 변질됐을지도 모른다. 용성이 내건 대각교의 종지는 명쾌했다. 대각은 부처의 다른 이름이었다. 부처는 자각(自覺)한 자이고 다른 이를 깨우쳐주는 각타(覺他)행이 보살도다. 계율과 청규는 마땅히 고법(古法)대로, 포덕행위는 날마다 새롭게 하는 것이 옳다고 본 것이다. 한마디로 법고창신(法古創新)이다. 용성의 대각교 노선은 일제의 외압으로 꺾이지만 오늘날 조계종의 근간이 되었다.



서울 봉익동 대각사
위치 서울 종로구 봉익동 2번지
규모 대각성전(지하 1층 지상 3층), 범종각
형식 한식과 현대식 조합형. 팔작지붕
시대 1911년 건립. 1987년 재건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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