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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추억] 광주학생운동 불러온 주인공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3면

"…피가 머리로 역류하는 분노를 느꼈다. 가뜩이나 그놈(일본인 학생)들과 한 차로 통학하면서도 서로 멸시하고 혐오하며 지내온 터인데 그자들이 우리 여학생을 희롱하였으니, 이는 나로서는 당연한 감정적 충격이었다. "

1929년 10월 30일 광주~나주 통학열차에서 일본 학생과 충돌해 광주학생운동을 촉발한 박준채(朴準埰)옹이 지난 7일 87세로 별세했다. 고인은 당시의 심경을 위와 같이 회고하곤 했다.

광주시 한국병원에 차려진 빈소에는 광주학생운동의 주역을 기리는 동지.후배.제자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았다.

"늘 우리 곁에서 광주학생운동의 정신이 더욱 빛날 수 있도록 했는데…. 동지회의 주춧돌이었어. " (김기권 광주학생독립운동 동지회장)

전남 나주의 유복한 가정에서 막내아들로 태어난 고인은 광주고등보통학교 2학년에 재학 중 일본인 학생들이 사촌 누나 박기옥(朴己玉)씨 등 광주여고보 학생들을 희롱하자 나주역 앞에서 그들을 불러세워 격투를 벌였다.

이후 고인은 일경에 체포돼 혹독한 신문을 받은 뒤 퇴학을 당했지만 이 사건은 시위운동으로 이어져 11월 3일 광주학생운동의 기폭제 역할을 했다.

사건 이후 '역사' 와 '정의' 라는 두 단어는 평생 고인의 삶속에 스며있었다. 퇴학당하고 집에서 쉴 때 "왜 그런 짓을 했느냐" 고 나무라는 일부 마을 어른들에게 고인은 "(내가 한 일은)역사에 남을 수 있을 것" 이라고 당당히 말하곤 했다.

해방 후엔 '정의필승(正義必勝)' 을 강조하는 올곧은 교육자로서 교단을 지켰다. 서울 양정고보로 전학해 학업을 마친 그는 일본으로 유학, 와세다대 정경학부를 졸업했다. 당시로서는 드물게 일본 유학을 마친 그는 60년 조선대 교수로 발탁됐고, 88년까지 법정대학장 및 대학원장을 역임했다.

교직에 있는 동안 군사정부로부터 회유와 탄압을 번갈아 받았고 집안 살림도 기울어 갔지만 그는 꿋꿋이 학생들에게 정의감을 심어줬다.

고인의 제자이자 동료였던 권광식 방송통신대 교수는 어둡던 그 시절을 이렇게 회고했다. "군사정권 시절 그는 교수들에게 어려운 일이 생기면 '역사에 물어보라' 고 가르쳤습니다. 한마디로 교수들의 정신적 지주셨죠. "

權교수는 특히 "70년대 새마을운동을 비판해 중앙정보부에 함께 끌려갔을 때 모두들 두려워했지만 선생님은 자신의 경험을 들려주며 격려해 주셨다" 고 말했다.

80년 조선대 교수들이 시국 양심선언을 한 배경에도 평소 고인의 가르침이 있었다고 지인들은 말했다.

60~70년대 광주시 동구 지산동 고인의 집을 찾은 제자들은 "연탄을 때지 못해 방이 차다" 며 늘 미안해 하던 모습에 오히려 송구스러웠다고 한다.

5남2녀 중 둘째아들인 형근(亨根.53)씨는 "고교를 졸업하고 돈이 없어 곧바로 취업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어렵게 지냈다" 며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박봉을 쪼개 고학생들을 돕는 아버지가 원망스러울 때도 있었다" 고 회상했다.

하지만 그는 "아버님의 엄한 가르침이 더 큰 성장을 가져왔다는 것을 깨달았고 이젠 자랑스러울 뿐" 이라고 말했다. 99년 11월 전남 나주에서 열린 광주학생운동 70주년 기념 세미나에 참석, 인사말을 하기도 했던 그는 지난해 11월부터 노환으로 병상에 누워 지내다 결국 세상을 떴다. 광주학생운동 정신을 빛낸 공적으로 국민훈장 석류장(88년).건국훈장 애족장(90년)을 받았다.

광주〓천창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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