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 시평] 정치개혁 없이 경제안정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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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최근 우리 경제가 다시 위기에 처할 수도 있다는 우려에서 정치개혁은 뒤로 미루고 경제를 안정시키는 일에 전력을 다해야 한다는 주장이 일고 있다. 물론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좋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경제정책의 책임자가 정치인이라는 점에 있다. 아무리 좋은 경제정책이 고안된다 하더라도 이의 채택 여부는 대통령 혹은 정책당국자 또는 국회에 달려있다. 그들은 본질적으로 정치인이므로 결코 정치를 제쳐두고 경제만 해결하려 하지는 않을 것이다.

***경제위기 누가 책임졌나

우리는 여기에서 3년 전 소위 국제통화기금(IMF) 경제위기의 원인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1997년의 경제위기는 갑자기 보유외환이 고갈되면서 시작됐다. 그 당시 정부는 원화의 대달러 환율을 8백대1로 유지하려 했는데 국내외 외환 투기자들은 극심한 무역적자의 지속을 근거로 원화가 고평가돼 있다고 판단하고 상대적으로 싼 달러를 마구 구입해 해외로 유출했다.

그런 현상은 사실 97년 중반부터 이미 감지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97년 후반까지 환율을 8백대1로 고수하려고 갖고 있던 달러를 마구 방출했다. 그 바람에 그나마 지니고 있었던 외환보유고마저 바닥을 보이게 됐던 것이다.

그러면 그 당시 정부는 왜 그토록 8백대1이라는 환율에 집착하고 있었을까. 우선 경제학적으로 쉽게 증명해 보일 수 있는 이유로 정부가 물가안정이라는 정치적 목표에 크게 집착하고 있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김영삼(金泳三)대통령은 대선 공약으로 다소 무리한 물가상승률 목표 3%를 내걸었는데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강제로 임금상승을 저지할 수 없게 되자 환율인상을 억제함으로써 물가를 안정시키려 했다.

또한 비록 객관적으로 증명해 보일 수는 없으나 정부가 고평가된 환율에 크게 집착한 다른 이유의 하나는 당시 정부가 내세웠던 국민소득 1만달러 시대의 달성이라는 정치적 선전에의 집착이었다.

우리 국민들은 그 당시 1인당 8백만원의 국민 소득을 올리고 있었는데 이를 8백대1이라는 환율로 나눌 경우 달러 표시 국민소득이 1만달러가 되는 것이다.

만일 환율이 1천대1로 상승할 경우 달러 표시 국민소득은 8천달러로 하락하게 된다. 따라서 김영삼 대통령의 임기인 97년 말까지만이라도 환율을 8백대1로 유지한다면 적어도 임기 동안에는 국민소득을 1만달러로 유지했다는 정치적 선전효과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요약컨대 우리 경제를 순식간에 위기로 치닫게 한 일차적 이유는 정치에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과연 97년 경제위기와 같은 엄청난 국가재난을 가져다준 정치책임자 또는 책임정당에 어떤 책임을 물었는가. 기껏해야 당시의 경제정책 책임자 몇 사람을 사법적 재판에 회부했으나 무죄로 판정이 나 오히려 그들에게 면죄부를 부여한 결과만 초래하지 않았는가.

사실 그 재판은 애초부터 잘못된 것이라 할 것이다. 정책적 과오에 대해 사법적 책임을 물을 것이 아니라 정책적 혹은 정치적 차원에서 책임을 물었어야 옳을 것이다. 정당정치체제가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은 탓으로 우리 국민은 그 후 대선에서 이름을 달리 한 한나라당에 패배를 안겨주었으나 그 패배는 정책실패에 대한 응징이라 할 수 없으며, 다음 해 치러진 총선에서는 지역감정을 등에 업고 오히려 최다수 정당이 된 사실은 하나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 칼자루 쥔 정치인이 문제

현 정권도 이제 2년 미만의 임기를 남겨두고 있다. 내년에는 지자체 선거를 치러야 하고 곧이어 다시 대통령 선거전에 돌입하게 돼 있다. 그런데 현행의 정치제도 아래에서는 또다시 정치인들의 이합집산이 벌어질 것이며, 또 정책의 결과에 대한 책임을 묻기보다는 사람 중심, 지역 중심의 정치가 재연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과연 이런 상황에서 현 정권이 정치를 제쳐두고 경제문제 해결에만 전념할 수 있을까. 경제정책은 정치인이 수행한다.

본질적으로 정치적 이익을 추구하려는 정치인에게 아무리 경제논리를 따르라고 외쳐 본들 그렇게 될 리 없다. 오로지 정치인의 행태를 바로 규율할 수 있게끔 정치제도를 개혁하는 길이 있을 뿐이다.

이영선 <연세대 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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