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추억] 고 한병삼 전 국립중앙박물관장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1면

4일 68세를 일기로 별세한 한병삼(韓炳三)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의 삼성서울병원 빈소는 급작스런 부음 때문인지 어수선했다.

"경주 경마장 문제 때문에 그렇게 고민하시더니…. 이제 한숨 돌렸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갑자기 돌아가실 줄이야. " (조유전 국립문화재연구소장)

"지난해 디스크 수술을 받고 경과가 좋아 안심하고 있었는데 아무 말씀도 못남기고 돌아가시다니…. " (장남 봉근씨)

디스크 수술 뒤 회복 과정에서 운동량이 부족해 백혈구 수가 떨어졌고, 저항력이 약해진 상황에서 가벼운 감기가 급성 폐렴으로 악화했다고 한다.

평생을 박물관에서 살아온 고인은 스스로 "박물관과 결혼한 사람" 으로 자부해 왔다. 1933년 평양에서 태어나 서울대 사학과를 나온 그는 당시 중앙박물관장이었던 김재원 박사의 눈에 띄어 58년 졸업과 함께 박물관에 취업, 85~92년 중앙박물관장을 지내고 퇴임 때까지 35년을 박물관에서 살았다.

고인은 특히 75~84년 경주박물관장으로 일하면서 천년 고도 경주를 세계문화유산으로 이끌어낸 주인공이다. 관장 시절 조양동 발굴을 주도, 기원전 사로국의 흔적을 찾아냄으로써 경주의 중요성을 세상에 다시 알렸다.

고인은 당시부터 "경주는 땅만 파면 역사가 되살아나는 곳이다. 전부 문화재 보존 지역으로 묶어 발굴해야 한다" 고 주장했으며 최근까지 문화재위원회 부위원장 겸 발굴을 담당하는 6분과 위원장으로 경주 경마장 건설을 막는 데 앞장섰다.

박물관 터줏대감인 고인은 고고학 발굴을 주도하거나 지원하는 데 헌신해 왔기에 93년 타계한 김원룡씨의 뒤를 이어 '고고학계의 맏형' 으로 불려왔다. 趙소장은 "고인을 맏형처럼 모신 것은 발굴이 있다면 어디든 달려가 '현장을 잘 지켜야 한다' 며 후배들을 채찍질해 온 열의와 정성 때문" 이라고 말했다.

그러다 보니 집에 머무르는 시간이 거의 없었고, 가족에게는 소홀할 수밖에 없었다. 봉근씨는 "항상 부재 중이던 아버지가 어렸을 적엔 원망스러웠다" 고 말했다. 물론 "성장한 뒤엔 자랑스러운 아버지임을 알았고 아버지가 가족들에게 미안해 하는 모습을 보일 때마다 오히려 부끄러웠다" 고 했지만.

한국 고고학에 '미친' 공로로 홍조근정훈장과 은관문화훈장을 받은 고인은 박물관장 퇴임 후에도 동국대 석좌교수로 고고학 연구를 계속해 왔으며, 지난 1일 입원 직전까지 중앙박물관 자료실에 매일 나가 일본에서 발표할 '부여 능산리 고분연구' 논문을 준비해 왔다. 유족은 부인 김화선(金花善.66)씨와 2남1녀. 발인은 8일 오전 7시며 장지는 고향인 북녘땅에 가까운 일산 동화공원묘지. 02-3410-6914.

오병상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