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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한-미가 남-북에 우선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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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3월 7일 워싱턴에서 개최될 김대중 - 부시 정상회담은 향후 평양을 상대하는 방식과 속도를 정하는 중요한 이벤트가 될 것으로 보인다.

우리 외교당국에 의하면 이 회담의 의제는 한.미동맹 및 대북공조체제 강화, 경제통상, 세계적 이슈에 대한 협력방안이 될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것들은 차라리 언론용 분식(粉飾)의제에 가깝고, 실제로는 제한된 시간에 회담을 하다 보면 '북한 다루기 교신 사이클' 을 서로 맞추는 데 바쁠 것이다.

한.미 양국이 북한을 두고 요새처럼 불협화음을 높인 때는 일찍이 없었다. 1979년의 박정희-카터 회담 때 서로 불편한 적은 있었지만 그 당시는 한국의 주한미군 철수반대와 미국의 한국인권문제 제기로 그랬다.

*** 공조강화 방안 합의 필요

이번에는 부시 정부가 중유 등 물자를 일방적으로 '퍼주면서' 북한의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겠으며 북한과의 관계정상화도 서두르지 않겠다고 해 문제가 생겼다. 금강산 달러 등이 북한의 군사력 증강을 돕는다는 우려는 한국에 대한 불만이나 다름없다.

최근의 외무장관 회담에서 한국이 한.미 공조의 중요성을 10번 강조하니까 미국은 20번 강조하고 싶어했다는 말은 언중유골이다. 한국도 미국과의 공동보조로 북한을 다뤄가자는 주문이다.

이런 상황은 임기 내에 한반도의 현상(現狀)을 바꿔놓고 싶은 金대통령에게 여간치 않은 도전이다. 외무장관회담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는 정보기관장을 2월 11일 워싱턴에 보내 국무장관 등을 불과 며칠 사이에 다시 만나게 했다.

무언가 황급한 일로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서두르는 것처럼 보인다. 김정일(金正日)국방위원장의 서울 방문을 한.미 정상회담보다 앞당기려던 것은 아니었는지 추측을 자아내기도 했다. 어떻든 최근의 한.미간 접촉에서 미국은 북한의 근본적인 변화에 회의적이며 대량 살상무기 협상결과를 입증할 수 있어야 한다는 등 대북 시선이 따가운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 조급하면 실수하기 쉬워

사실 클린턴 시대에는 중병을 앓고 있는 북한을 살리는 방향으로 미국과 한국이 경쟁을 벌일 정도였다. 북한의 핵문제에 관한 제네바 합의로부터 거의 실현될 뻔했던 클린턴의 방북까지가 미국의 몫이었다.

한편 한국은 평양 정상회담의 성사로 물살을 바꿔놓았고 金위원장의 서울 답방으로 모멘텀을 유지하려던 참이었다.

말하자면 한.미.북 3각관계에서 미.북과 남.북이 상향곡선을 긋고 있던 사이에 한.미는 뒷전으로 밀리거나 마찰을 빚고 있었다. 이런 판국에 등장한 부시 정부는 3각관계의 기상도를 모두 흐리게 만들었다.

이번 한.미 정상회담에서는 최근의 외무장관 회담 때처럼 한국측 얘기를 주로 듣게 되리라는데 金대통령은 다음과 같이 회담에 임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첫째, 햇볕정책으로 한.미관계에 고장이 나있는 것을 유념한다. 권력의 속성인 고집은 이 고장을 고치기 어렵게 만든다. 그래서 한.미 동맹정신에 회부해야 한다. 차제에 '민족은 동맹보다 낫다' 는 발상을 아예 버려야 한다. 양국은 한.미가 남.북이나 미.북보다 앞선다는 것을 확실히 할 수 있어야 한다.

둘째, 미국의 근본적 대북관을 바꿔보려는 시도를 삼간다. 상호주의는 외교에서 기본 중의 기본인데 이것을 둘러싸고 짧은 시간의 회담기회를 토론장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은 피해야 한다. 오히려 인도적 대북원조 등의 조치를 취하는 데 공조를 강화할 수 있는 방안에 합의할 수 있어야 한다.

셋째, 한.미관계의 수리와 미국의 대북정책 구체화에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아 남북관계가 냉각기를 거치지 않을 수 없음을 시인한다.

북한 외무성의 2월 21일자 담화문은 북한의 대미 및 대남관계가 이미 하강곡선으로 진입했다는 시그널이다. 金위원장의 서울 방문문제로 무리수를 쓰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金대통령은 마음을 비우고 시간을 뛰어넘으려 하지 말아야 한다.

이장춘 <전 외교통상부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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