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인들의 쉼터 울산 '비홍산방' 눈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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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2월의 셋째 주말인 지난달 18일 오후 울산시 울주군 범서면 척과리 치술령 자락의 ‘비홍산방’(飛鴻山房).

척과저수지가 내려다 보이는 산자락 6백여평에 통나무집과 황토 오두막이 봄볕을 이고 앉았다.작은 집들은 갤러리 ·찻집 ·공연장 ·작가들의 휴식처 등이다.

찻집 안팎에 가족 ·연인 1백여명이 자리 잡고 앉았다. 40평 남짓한 찻집 비홍다원 옆 테라스에서 공연이 시작됐다.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인 ‘갯바람 솔바람’을 이끄는 이일우(李日雨)씨와 음악가족 10여명이 주말마다 펼치는 무대다.

어쩐지 공업도시 울산과는 잘 어울리지 않는 문화·예술의 텃밭이 있는 것이다.

‘대동강이 풀린다’는 우수.첫곡으로 ‘그리운 금강산’이 오르간 선율을 타고 치술령 계곡으로 은은히 퍼져 나갔다.이어 색소폰·기타 반주에 맞춰 라틴음악·재즈·팝송을 비롯해 손님들이 청한 가요까지 잇달아 생음악으로 흘러 나온다.

도심인 태화강 신삼호교에서 15㎞쯤 떨어진 외딴 골짜기서 열리는 음악회는 자연과 조화를 이뤄 관객들에게 더 진한 감동을 안겨준다.

비홍산방에서 펼치는 모든 공연·전시회는 무료다.내로라는 음악인들이 예술의 열정을 불태우고,아마추어 예술가들은 가창력을 가다듬는 발표무대다.

여고 2학년때부터 여기서 노래를 불러온 김현정(19 ·인제대1년)씨는 지난해 고복수가요제에서 가요부문 대상을 받기도 했다.

비홍산방이 문을 연 것은 1999년 6월. 90년대초 모 건설업체 사장인 이문태(李文泰·47)씨가 사원연수원으로 지었으나 지역 예술인들의 모임이나 수련장으로 이용되면서 예술의 싹이 트기 시작했다.

IMF로 회사를 청산한 李씨는 이곳을 갤러리·야외공연장 등을 꾸미고 비홍산방 문패를 내걸고 본격적인 문화마당으로 가꾸어갔다.

마땅한 무대나 전시공간을 찾지 못한 지역 예술인을 위한 문화공간을 마련한 것이다.봄부터 가을까지는 잔디밭 야외공연장에 무대가 차려진다.

갤러리 ‘물소리’에선 한달에 두세번 그림·서예 초대전이 열린다.대관료도 없고 팸플릿 ·플래카드까지 만들어 준다.

지난 연말 이화여대 동문 작품전인 ‘율전’ 등 지난 한해동안 국내·외 유명 작가들의 초대전이 스물다섯차례나 열렸다.

야외공연장 객석인 잔디밭은 가족들을 따라 온 아이들이 풀내음을 맡으면서 뛰놀수 있는 운동장으로 제격이다.

잔디밭 가장자리에 작은 토담집 3채는 작가들이 창작에 몰두할 수 있도록 꾸며진 방이다.작가와 만남의 행사도 열린다.

솔향기 그윽한 숲속 산책로 거닐다 보면 물소리 ·새소리의 화음을 들을 수 있어 도시인들에게 색다른 감동을 안겨준다.

치술령 맑은 물로 우려낸 전통차와 막걸리도 맛이 뛰어나고 구수한 도토리묵 맛도 일품이다.

李씨는 비빔밥 ·칼국수 ·차를 팔아 운영경비로 쓰지만 항상 적자다.

단골인 이명호(李明鎬 ·52)씨는 “마땅히 쉴 곳이 없는 울산에서 주말마다 비홍산방 공연 ·전시회를 보면 한 주일의 피로가 싹 가신다”고 말했다.

울산=허상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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