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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식·일본식이 기묘하게 뒤섞인 고종 황제 장례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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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1919년 2월 9일 덕수궁(경운궁) 함녕전에서 데라우치 총독을 비롯한 총독부 고위 관리가 참석한 가운데 일본 신관(神官) 주재로 일본 왕가의 장례의식인 봉고제가 열렸다. 고종의 장례는 일본 궁내성이 주관한 일본의 국장이었지만, 한국인들은 마음속으로 고종과 대한제국을 함께 장사 지내고 대한민국을 선포했다. [서울대박물관 제공]

1919년 3월 3일, 조선의 26대 왕이자 대한제국의 첫 황제였으며, 경술국치 이후 일본제국의 ‘덕수궁 이태왕(李太王)’이 된 고종 이희(李凞)의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그는 공식적으로는 일본제국이 내려준 ‘이태왕’이라는 지위에서 서거했지만, 대다수 한국인은 그를 대한제국 황제로 기억했다. 그의 지위에 대한 비균질적인 기억은 장례 절차에도 새겨졌다. 공식적으로는 일본제국의 국장(國葬)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식과 한국식이 뒤섞인 기묘한 행사가 되었다.

장례일을 앞두고 수많은 사람이 고종의 승하를 애도하기 위해 서울에 들어왔다. 고종이 일본인들에게 독살당했다는 소문이 돌았던 것도, 그의 장례일을 이틀 앞두고 3·1 만세운동이 일어난 것도, ‘대한제국 황제 고종’에 대한 대중의 기억을 자극하고 동원하려는 의도가 작용한 결과였다.

군주든 대통령이든 통치자는 사람들의 집중적인 관찰 대상이자 사람들의 입에 가장 많이 오르내리는 인물이며, 퇴위 이후나 죽은 뒤에도 가장 많은 사람이 기억하는 인물이다. 고종 재위 시에 그의 반대편에 섰던 사람들은 고종을 나쁘게 기억했다. 대한제국 스스로 자멸한 것이라는 생각을 한국인들에게 유포시키고자 했던 일본 역시 고종에게 망국의 책임을 몽땅 덮어씌우는 데 분주했다. 무능하고 유약하며 욕심 많은 임금, 어려서는 아버지에게, 자라서는 처에게 휘둘린 줏대 없는 임금이 일본인들이 유포시킨 고종에 대한 ‘공적(公的) 기억’이었다.

일제 강점기에 고종에 관한 새로운 ‘공적 기억’은 학교 교실이나 총독부의 검열을 무난히 통과한 출판물 등을 통해 널리 유포되었지만, 대한제국 시기에 형성된 ‘공적 기억’을 완전히 대체하지는 못했다. 어느 제삼국인은 대한제국 시기 한국인들의 고종에 대한 일반적인 생각을 이렇게 요약했다. “황제는 아시아의 다른 나라 군주들처럼 신하들이 종교적이기까지 한 경외심(敬畏心)을 갖고 바라보는 존재는 아니지만 모든 백성들로부터 보편적인 사랑을 받고 있다.”(카를로 로제티, 『꼬레아 꼬레아니』)

살아서는 왕에서 황제가 되었다가 다시 태왕으로 강등된 굴곡을 겪은 고종은, 죽어서는 서로 다른 기억들이 다투는 ‘장소’가 되었다. 그리고 지금 한국 사회는 이미 퇴임하거나 서거한 여러 전직 대통령들을 또 다른 ‘기억의 싸움터’로 삼고 있다. 수십 년을 같이 산 부부조차 같은 일을 다르게 기억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 법이니, 수많은 사람이 한 인물에 대해 똑같이 기억하기를 바랄 수는 없다. 기억은 언제나 실체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게 마련이라는 사실만 잊지 않는다면 서로를 용인하는 폭도 넓어질 것이다.

 전우용 서울대병원 병원역사문화센터 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