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홍구 중앙일보 고문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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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역사를 임기나 선거일정으로 토막낼 수는 없다.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의 취임 3주년이 가까워 오면서 그의 임기나 다음 대선이 불과 2년밖에 남지 않았다는 소리는 사람들의 마음을, 특히 집권자와 정치인의 마음을 조급하게 만들고 있다.

그런 이야기가 부자연스러운 것은 아니지만 나라와 민족의 먼 훗날을 긴 역사의 눈으로 내다보는 데는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한다. 현 정권에서 못 다한 일은 다음 정권에서, 2년에 못 다한 사업은 다음 10년에 걸쳐 처리될 수도 있으니 너무 조바심을 낼 필요는 없다.

오히려 시대적 흐름의 대세를 파악해 일관성 있게 지켜갈 국가적 비전을 확립하는 작업을 소홀히 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이를 위해선 지난 반세기에 걸친 국가적 경험이 남겨준 역사의 교훈을 되새겨야 할 것이다.

나라를 경영하는 데도 언제나 적자(赤字)를 조심해야 된다는 것은 새삼 강조할 필요조차 없다. 이러한 적자운영의 위험은 특히 경제운용의 차원에선 너무나 자명하다. 재정적자나 무역수지적자의 누적을 경계하고 과도한 국가부채로 후손들“?큰 빚을 남기지 않도록 노력해야 된다는 것은 어느 정부나 명심했던 원칙이다.

지난 3년간 심각한 경제위기에 시달려온 우리로서는 국가경제의 적자운영 예방의 중요성을 비싼 수업료를 치르면서 다시 배운 셈이 됐다.

이렇듯 경제의 적자운영에 대하여는 매우 민감하면서도 정치의, 또는 권력의 적자운영에 대해선 국민들 사이에 충분한 이해가 없는 듯 보인다. 국가권력도 지출과 수입의 균형이 이뤄져야만 정치 안정을 이룰 수 있다는 비교적 단순한 원칙을 나는 대학의 정치학개론 강의에서 여러 해 동안 역설해 왔으나 그 원칙을 상식화하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다.

나라가 극복하고 해결해야 할 도전과 과제가 크면 클수록, 개혁의 수요가 많으면 많을수록, 정부의 강한 리더십이 필요하면 할수록 권력의 지출은 급격하게 상승할 수밖에 없다. 그러한 권력지출 증가에 걸맞은 권력수입의 증대가 이뤄지지 못하면 권력의 적자운영이 불가피해 지며, 그 적자의 폭이 어느 수준을 넘으면 정치적 위기를 초래하게 된다는 원칙은 한국정치사에서도 예외없이 적용돼 왔다는 사실이 널리 이해되지 못하고 있다.

권력을 행사하는 지출의 전문가는 많은데 비해 권력의 수입에 전념하는 전문가는 많지 않은 듯 싶다. 그것은 권력자원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데도 원인의 일부가 있는 것 같다. 권력이란 무(無)에서 유(有)를 창출하는 요술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시대적 변천에 따라 효용성이 변하는 권력자원을 개발해 적절히 동력화하는 권력수입의 과정을 거쳐 권력은 생산되는 것이다. 권력자원으로 종교적 신화.이데올로기.애국심이 중요한 시대도 있었다. 경제적 혜택과 특혜를 꼽던 시대도 있었으며 폭력.무력.군사력의 독점이 결정적인 시대도 있었다.

그러나 오늘의 민주화시대에 가장 중요한 권력자원은 국민의 지지임에 틀림없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는 헌법 조문은 바로 민주화시대 권력창출의 원칙을 밝힌 것이다. 나라의 일이 크면 클수록, 즉 권력지출이 늘면 늘수록 국민의 참여와 지지라는 권력수입도 늘려야만 권력의 적자운영을 예방할 수 있다.

국민의 지지란 국민적 합의와 연계해 생각해야 한다. 정당이 중심이 된 의회의 운영과정에선 국가의 구체적 정책이나 예산 등을 다수결의 원칙에 의해 처리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국가존립과 기본방향에 관한 선택이나 변화는 광범위한 국민적 합의를 바탕으로 해야만 안정적으로 운용할 수 있다. 국회의 표결에서는 한 표만 많아도 결말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국민적 여론의 차원에선 50대 50이란 완전한 국민적 분열을 뜻하며 이론적으론 1백대 0일 경우만 완전한 합의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국가적 기본방향에 대한 국민적 합의는 지지층이 3분의 2를 넘거나 상당한 수준의 합의일 때만 유효한 것이다.

역사적 전환기의 국가운영이 고달픈 것은 바로 그러한 수준의 국민적 합의를 도출하는 권력수입이 너무나 어려운 과제이기 때문이다.

21세기에 접어든 세계화 과정에서 많은 나라들이 민주화 실험에 실패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 국민적 합의를 기반으로 해야만 통일도 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겨레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선 무엇보다 마음의 여유가 필요하다. 더 많은 일, 더 큰 일을 무리한 속도로 추진하다 보면 권력의 적자운영이란 덫에 걸린다는 우리 헌정사의 교훈을 되새겨야 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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