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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컵, 역대 감독에게 듣는다 <1> 김정남, 1986 멕시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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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1986년 멕시코 월드컵 대표팀을 맡았던 김정남 감독. 그는 “상대에 대한 최소한의 정보도 없이 싸움터로 나갔다”고 회고했다. [중앙포토]

1985년 9월 3일 오후. 일요일이었지만 시내 백화점과 고궁은 한산했다. 반면 서울 잠실운동장에는 오전부터 시민들의 발길이 꼬리를 물었다. 한국과 일본의 멕시코 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 마지막 경기가 열린 날이었다. 4000만이 함께 뛴 이날 한국은 허정무의 결승골로 1-0 승리를 거뒀다. 54년 스위스 대회 이후 32년 만에 월드컵 본선행을 확정 짓는 골이었다.

#어떻게 준비할지 막막

지난달 시내 한 카페에서 김정남(67·프로축구연맹 부회장) 1986년 멕시코 월드컵 감독을 만났다. 24년 전 그는 조심스러운 성격과 곱상한 외모 때문에 새색시 같다는 평을 들었다. 이젠 깊은 주름이 자리 잡았지만 그때 일을 날짜까지 꼽아 가며 정확히 기억했다. 월드컵은 그의 인생 최고의 잔치였다.

“월드컵 진출은 신나는 일이지만 막상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 막막했다. 도대체 얼마나 센 팀을 상대할지 막연하고 두려웠다”고 했다. 게다가 첫 번째 상대는 ‘축구 신동’ 마라도나가 버티고 있는 아르헨티나였다.

“외신 기자들이 마라도나를 어떻게 막을 거냐고 물으면 ‘투망을 던져 잡겠다’고 답했다. 전담 마크맨을 두면서 협력 수비로 마라도나의 활동 반경을 줄이겠다는 뜻이었다.” 킥오프를 앞두고 라커룸에서 선수들에게는 “초반 30분만 버티면 우리에게 기회가 올 것”이라고 큰소리를 쳤다. 일단 수비를 견고하게 하고 역습을 노리는 전략이었다.

30분만 버티자는 말을 선수들은 “수비만 하라”는 말로 이해했다. 김 감독은 “경기 초반에 선수들이 너무 경직됐다. 너무 소극적으로 수비만 했다. 밸런스가 무너지고 선수들이 쓸데없이 뭉쳐 다녔다”고 패인을 진단했다. 한국은 전반 6분과 18분 상대에게 프리킥 세트피스로 잇따라 골을 허용했다. 초반 30분만 잘 넘기자고 했지만 결국 몸에 힘이 잔뜩 들어간 초반 30분에 경기를 그르쳤다. 김 감독은 “그때와 지금은 다르다. 지금 세대는 월드컵을 보면서 자랐다. 해외파도 훨씬 많다. 우리 때처럼 주눅들 일도 없고 그렇지도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판사판 … 뒤늦게 시동이 걸리다

하프타임에 김 감독은 “두 골 차로 지나 세 골 차로 지나 마찬가지”라고 선수들에게 힘을 불어넣었다. 그는 “이판사판이 아니냐”고 했다. 김 감독은 “후반 시작한 지 얼마 안 돼 추가골을 내줬지만 0-3이 된 뒤부터 경기가 풀렸다”고 말했다. “박창선이 골을 넣었지. 그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던지”라고 말하는 김 감독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혹시 아르헨티나가 슬슬 한 건 아닐까요”라고 물었다. 김 감독은 발끈했다. 그는 “월드컵 첫 경기여서 상대도 여유를 부릴 수 없었다. 조금만 힘을 내면 3-2가 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아르헨티나도 끝까지 마라도나를 빼지 못하며 전력을 다했다”고 했다. 김 감독은 “비록 패했지만 우리도 충분히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은 경기”라고 평했다.

이후 한국은 점점 더 좋은 경기를 했다. 그는 “불가리아와 2차전에서 무승부를 거뒀다. 한국이 월드컵에서 첫 번째 승점을 딴 경기였다. 이탈리아에 2-3으로 졌지만 10분만 더 뛰었다면 3-3을 만들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때는 16강에 못 간 것이 너무 아쉬웠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때 패배가 한국 축구의 밑거름이 됐다는 생각이다. 이번 남아공에서 다시 아르헨티나를 만난다니 감개무량하다. 더구나 허정무 감독과 마라도나가 재회한다니…. 그때 허정무가 마라도나를 얼마나 잘 막았는지 몰라.” 김 감독은 “맡긴 임무는 무슨 일이 있어도 해내는 허 감독이 뭔가 해낼 것”이라고 말했다.

이해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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