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한국문학번역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고구려의 북방 영토를 회복하기 위해 궁예는 먼저 사대(史臺)를 두었다.

우리 역사상 외국어 교육을 담당한 최초의 관청으로, 정확한 통역과 번역은 외국 진출을 위해 필수적임을 궁예가 일찍이 깨달은 것이다.

고려시대에는 말기 충렬왕 때에 와서야 통문관(通文館)을 설치했다.

풍부한 지식과 외국어 교육을 체계적으로 받지 못한 통역자 '설인(舌人)' 들에 의해 무분별하게 이뤄지고 있던 통역을 바로잡기 위해서다.

이 통문관은 조선시대에 이르러 사역원(司譯院)으로 확대.발전된다.

사역원은 풍부한 경험과 지식을 갖춘 교수와 외국인을 두고 중국어.몽골어.일본어.여진어 등을 교육하고 통역.번역 일을 했다.

엄격한 시험을 거친 학생들 중 성적이 우수한 자들은 종신토록 사역원의 관리로 머물 수 있었고 다른 관직에도 발탁될 수 있게 우대했다.

한국문학번역원이 이달 말께 설립된다(본지 19일자 18면).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은 "우리나라 문학 작품 중에도 충분히 노벨문학상 후보가 될 수 있는 작품이 많으며, 정부가 번역원 등을 설치해 지원하는 것이 좋겠다" 고 했다.

기실 다른 분야보다 먼저 문학 쪽에서 노벨상이 나오리라 기대해 왔었다. 작품성도 높고 1988년부터는 국제펜클럽 한국본부에서 후보를 추천해왔기 때문이다.

또 80년대 들면서 문예진흥원과 펜클럽, 한국문학번역금고와 대산문화재단 등에서 한국문학 번역과 해외 소개에 힘을 들여왔다.

그럼에도 한국문학번역원을 설립하겠다는 것은 문학작품을 온전히 번역.소개하는 것이 그만큼 힘들다는 것을 정부도 인정한 것이다.

"그 휘황찬란한 한국 토속어의 빛깔과 깊은 맛을 어떻게 다른 언어로 오롯이 옮길 수 있을 것인가."

80년 가톨릭 수사로 영국에서 한국에 왔다 귀화해 서강대 교수로 있으며 한국문학을 번역해오고 있는 안선재씨가 서정주 시 번역을 하며 토로한 말이다.

번역은 원전의 의미와 인상을 다른 언어로 옮겨 그 독자도 똑같이 받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잘 옮겨도 문화적 전통에 따라 단어의 의미에 차이가 있고, 특히 운율과 형식미 등 감정적.예술적 자질까지 갖춘 문학작품의 맛을 고스란히 전하는 것은 그만큼 더 어렵다.

이제 한국문학번역원이 설립된다 하니 언어의 뜻에 숨겨진 한국인의 정서까지 그대로 전할 훌륭한 번역문학가들을 많이 발굴, 대접해 한국의 깊숙한 마음이 세계에 그윽하게 전해지길 바란다.

이경철 문화부장대우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