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od&] 정월, 장맛을 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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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21면

항아리 입구에 금줄을 두르고 그 사이마다 숯과 붉은 고추를 끼우는 것은 잡귀와 액운을 막기 위한 풍습이다.

옛 속담 중에 “장이 단 집은 복이 많다”는 말이 있다. 장을 담으려면 가을부터 봄까지 손이 많이 간다. 이 때문에 웬만큼 부지런하지 않으면 제대로 된 장맛을 낼 수가 없다. 속담은 단맛 나는 장을 만들 만큼 부지런한 며느리가 들어왔으니 집안의 복이라는 뜻이다. 음력 정월은 그 부지런한 며느리들에게 중요한 달이다. 겨우내 말려두었던 메주로 드디어 장을 담글 시기이기 때문이다. 된장도 간장도 사먹는 시대. 정월장을 담그는 풍습도 아련해지는 때다. 도대체 정월장은 무엇이고 어떻게 담그는 것인지를 보러 ‘장의 고장’ 전북 순창으로 갔다.

순창=서정민 기자 사진=권혁재 전문기자

‘장의 고장’ 순창 나들이

“항아리에 소금물을 부을 때는 이렇게 채 바구니에 얇고 고운 면포를 깐 다음 부어야 찌꺼기를 잘 거를 수 있어요.”

전북 순창에 사는 오순이(74) 할머니 집에 도착했을 때, 할머니는 마침 옹기 항아리에 소금물을 붓고 있었다. 할머니는 장연구가인 신동화 전북대 명예교수가 ‘전통 방식대로 장 담그는 집’이라고 소개한 사람이다. 14세부터 어머니를 도와 장을 담그기 시작했던 할머니는 13년 전부터는 ‘순창 오순이 전통식품’이라는 이름으로 장을 만들어 팔기 시작했다.

1 흰색 버선본을 거꾸로 붙여 놓으면 잡귀는 물론 항아리 안으로 꼬이는 벌레도 막을 수 있다고 한다.

항아리 안을 들여다보니 황금빛과 갈색이 잘 조화된 메주가 차곡차곡 담겨 있고, 그 위에 대나무를 얼키설키 엮어놓았다. 대나무는 메주가 뜨지 못하게 눌러놓는 용도라고 했다. 소금물 붓기가 다 끝나자 할머니는 미리 준비해둔 금줄(짚으로 꼰 새끼줄)을 항아리에 둘렀다. 금줄 사이사이에는 숯 조각과 빨간 고추를 끼웠다. 예부터 우리 조상들은 빨간 색이 잡귀와 액운을 막아준다고 믿었다. “간장 항아리에 빨간 고추를 몇 개 넣어두는 것도 같은 이유예요. 이렇게 하면 매운 맛이 장에 배어서 여러 모로 좋죠.”

신 교수는 “예전에는 말날(午日·말의 날)에 주로 장을 담갔는데, 말은 털 달린 짐승 중 가장 피가 붉기 때문이었다”며 “예전엔 간장·된장이 썩는 이유가 잡귀가 붙어서라고 생각해 붉은 색으로 액막이를 했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할머니는 항아리에 버선 모양으로 오린 한지를 붙였다. 금줄과 마찬가지로 잡귀를 막기 위해서다. “버선목을 아래로 향하게 붙여 놓으면 장 항아리에 붙으려던 귀신이 막힌 코에 잡히거든요.” 하얀 색깔이 햇빛을 받아 빛나면 항아리 주위로 꼬이던 벌레들이 버선본으로 몰리게 된다는 것도 이유다.

“정월장이란 게 간장을 말하는데 과정이야 간단하지. 메주를 항아리에 차곡차곡 채우고 미리 풀어둔 소금물을 부으면 끝나요.”

2, 3 겨우내 새끼줄에 걸어두었던 메주를 장항아리로 옮겨 담고 있는 오순이 할머니.

정월장 담그기는 이렇게 싱겁게 끝났다. 하지만 그 준비과정은 녹록지 않다. 할머니는 “좋은 장맛을 위해서는 그 이전의 준비과정이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장이 맛있으려면 우선 지난해 가을에 만든 메주가 맛있어야 한다. 메주가 맛있으려면 그해 수확한 콩이 맛있어야 하고…, 소금도 미리 준비해야 한다. 오 할머니는 전라도 신안에서 생산된 천일염을 쓴다고 했다. 소금은 잘 사는 걸로 끝나는 게 아니다. 최소 반 년 이상은 마포에 담아 간수(습기 찬 소금에서 빠지는 짜고 쓴 물)를 빼고 잘 말려야 한다.

장을 담그는 날보다 전날 준비가 더 분주하다. 잘 말려놓은 천일염을 물에 풀어두고, 항아리를 소독해 두어야 한다. 물에 씻고 햇볕에 말린 다음, 불 붙인 신문을 항아리에 넣고 엎었다 바로 세우면 항아리의 잡균이 사라진다고 한다.

장 담그기는 끝났다. 이젠 장맛을 내는 일만 남았다. 햇빛과 바람과 정성이 장의 맛을 들여줄 차례다. 오 할머니는 “항아리가 숨을 쉬어야 장맛이 좋아진다”며 “꼭 옹기를 쓰라”고 일렀다. 시간 맞춰 항아리 뚜껑을 열었다 닫아줘야 하고, 항아리의 숨구멍이 미세 먼지로 막히지 않게 매일매일 마른 행주로 항아리를 잘 닦아줘야 한다. 오 할머니 집 마당에는 나란히 줄을 맞춘 150여 개의 옹기가 서 있다. 할머니는 매일 아침마다 어린 손자 보듬듯 항아리들을 닦는다고 했다. 이름표가 없어도 언제 담근 건지 정확히 기억한다고 했다. 그만큼 정성을 기울이는 때문으로 보였다.

[TIP] 따뜻해지기 전에 장 담가야 제맛 나죠

왜 음력 정월이 장 담그기에 좋은 때일까. 전통 장 연구가인 신동화 전북대 명예교수는 “가을 햇콩으로 쑤어서 겨우내 잘 말려둔 메주가 날이 따뜻해 썩기 전에 장을 담가야 맛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콩 발효에 적당한 미생물이 메주 표면에 붙고, 이게 서서히 메주 속으로 들어가 자라면서 효소를 만드는 게 장이 익어가는 과정이다. 그런데 이 과정이 따뜻할 때 일어나면 음식을 썩게 하는 균이 먼저 활동해 메주를 못 쓰게 만든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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