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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만들기’와 ‘역사 지우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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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얼떨결에 들어왔지만 연극은 볼 만했다. 링컨을 전국적 인물로 부각시킨 스티븐 더글러스와의 7차례에 걸친 정치 토론을 다뤘다. 노예 문제를 놓고 부딪친 링컨과 더글러스의 논쟁이 사사건건 대립하는 오늘의 미국 정치, 그리고 한국을 연상시켰다. 더욱 흥미를 끈 것은 극장 자체였다. 링컨이 총탄을 맞은 특별석이 당시 모습 그대로 보존돼 있어 눈길이 자주 그곳으로 옮겨졌다. 연극 막바지엔 무대 오른쪽 위 링컨 특별석에 불이 켜지고 “스스로 얻은 빵을 먹을 권리에서 흑인은 나와 더글러스뿐 아니라 모든 사람과 동등하다”는 링컨의 육성이 흘러 나왔다.

극장 맞은편 건물은 저격당한 링컨이 숨진 피터슨 하우스다. 극장 특별석처럼 링컨이 누워 있던 침대가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좀 더 북쪽에는 국립보건의학박물관이 있다. 이곳엔 부검 때 링컨의 머리에서 제거한 총알이 전시돼 있다. 며칠 뒤 박물관을 찾았더니 많은 관객들이 헝겊에 묻은 링컨의 피와 머리카락, 총알을 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유물·유적의 보존뿐만 아니다. 연구하고 복원하고 이벤트를 만들어내는 데도 열심이다. 링컨에 관한 책만 1만4000종이 넘는다. 수도 워싱턴에는 워싱턴·제퍼슨·링컨 기념관이 있지만, 역대 대통령의 고향이나 연고지마다 기념관 설립이 활발하다. 텍사스주 댈러스에 건립될 조지 W 부시 기념 도서관을 위해선 2억 달러(약 2600억원)가 모금됐다. 기념관이 완성되면 이라크 공격 명령 등 부시 대통령의 주요 자료가 보관된다.

우리와는 많이 다른 모습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저격된 궁정동 안가(安家)는 굴삭기로 철거됐다. 1999년 김대중 당시 대통령 후보의 제안으로 시작된 박정희 기념관 건립은 여전히 논란 중이다. 이승만 등 다른 대통령도 사정이 다르지 않다. 자료를 디지털화하거나 한 곳에 모으는 작업도 초라한 수준이다.

얼마 전 여행 안내서 출판사인 론리플래닛이 서울을 세계 3번째 ‘최악의 도시’로 선정했다. 서울이 그 정도로 형편없다고 생각할 사람은 극소수일 것이다. 하지만 ‘영혼이 없는 단조로움’이 선정 이유였다는 점을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워싱턴은 역사가 짧은데도 나름의 스토리를 간직한 건물들이 적지 않다. 그런 스토리가 문화 자산 역할을 톡톡히 한다. 서울은 600년이 넘은 고도(古都)인데도 역사 복원보다 ‘역사 지우기’에 더 열심인 듯하다. 포드 극장은 최근 보수 작업을 위해 2500만 달러(약 290억원)를 모금했다.

최상연 워싱턴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