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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일장수로 연명하다 ‘상하이 실세’로 떠올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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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두웨셩(오른쪽)은 20세 되는 해 봄 청방에 가입했다. 청방 최고의 실력자가 된 뒤에도 공개석상에서는 선배들을 깍듯이 대했다. 중간에 나서는 법이 없었다. 장사오린(가운데)도 두와 함께 상하이의 3대 두령 중 한 사람이었지만 세력이나 수준이 두에게는 한참 미치지 못했다. 장비(張飛)라는 별명에 걸맞게 일대일로 붙는 싸움에서는 당할 자가 없었다. 김명호 제공

1949년 신중국이 수립되기 전까지 상하이는 하나의 거대한 극장이었다. 마오쩌둥, 장제스, 장쉐량, 쑨원, 왕징웨이, 장칭 등 희대의 수퍼스타들도 이 도시에서만은 솜씨를 제대로 펼치지 못했다. 상하이는 청방(靑幇)의 천하였다.

중국의 비밀결사는 연원을 헤아리기 불가능할 정도로 그 뿌리가 깊다. 손가락 수백 개가 있어도 세기 힘들 정도의 비밀결사들이 수천 년 동안 생겨나고 몰락했지만 모두 지하조직이었다. 정부, 언론, 교육, 군대, 금융, 경찰 등 사회의 모든 기관에 영향력을 행사했던 공인된 비밀결사는 청방이 유일했다.

청(淸)대의 조운(漕運)은 규모가 엄청났다. 1만1254척의 조운선이 세수(稅收)로 거둬들인 양곡을 수도나 지정된 장소로 운반했다. 선원들은 몰락한 농민, 파산한 수공업자와 유랑민 출신이 대부분이었다. 굶어 죽지 않을 정도의 대우를 받았다. 가족 부양은 꿈도 꾸지 못했다.

불교와 도교가 혼합된 나교(羅敎)가 선원들을 주목했다. 조운선의 전용 부두마다 암자를 설립하고 숙식을 제공했다. 남북을 오가며 노동과 빈곤에 허덕이던 선원들에겐 더할 나위 없는 휴식처였다. 나교와 연합해 비밀결사 청방을 탄생시켰다.

정부는 나교를 방치하지 않았다. 암자를 허물고 간부들을 중형에 처했다. 그 와중에서도 청방은 운하 유역을 중심으로 세를 확장해 나갔다. 마을 전체가 가입한 경우도 허다했다. 운하 연변에는 3만여 개의 크고 작은 촌락형 도시가 있었다.

1825년부터 정부는 조운을 해운(海運)으로 대체했다. 실직한 선원들은 비적이나 무장한 소금 밀매원으로 변신해 염효집단(鹽梟集團)을 형성했다. 구성원 거의가 청방이었다.

사회에 진출한 두웨셩의 과일장수 시절 친구들. 청방의 주요 간부가 된 이들은 평생 두의 충실한 제자를 자처했다. 상하이 경비사령부 군법처장 루징스(앞줄 오른쪽 둘째)와 상하이총공회 주석 주쉐판(앞줄 가운데).


19세기 말 혁명 세력들이 청방을 끌어들였다. 신해혁명이 발발하자 상하이를 해방시킨 천치메이(陳其美)는 청방의 두령급 인물이었고, 결사대를 조직해 항저우를 점령한 청년 장제스도 청방이었다. 위안스카이가 몰락하자 장쑤·저장 일대의 염전 지역을 놓고 군벌들 간에 쟁탈전이 벌어졌다. 염효집단은 군벌들의 동네북이었다. 이리 차이고 저리 차였다. 일부는 군벌에 흡수되거나 붕괴 직전까지 내몰렸다. 청방은 살길을 찾아 각지로 흩어졌다.

청방에게 상하이는 별천지였다. 서구 열강의 중국 침략 전초기지였지만 현대 문명이 고스란히 자리 잡은 하나의 독립된 국가였다. 천치메이가 군대를 장악하고 있는 바람에 보호를 받을 수 있었다. 중국인 거주 지역에서 대형 사고를 쳐도 프랑스 조계로 넘어오면 그만이었다. 호적제도도 없었다. 군벌부대와 염전을 전전하던 청방은 상하이로 향했다. 두령급만 하더라도 장수성(張樹聲), 자오더청(趙德成), 천스창(陳世昌) 등 전설적 인물들과 위안스카이의 차남 위안커딩(袁克定) 등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순식간에 상하이 인구는 10만 명이 증가했다. 이들의 상하이 집결은 청방 최대의 전성기를 예고했지만 청방을 밝은 세상으로 끌어내고 현대화한 사람은 이 안에 없었다.

두웨셩(杜月笙)은 1888년 음력 7월 15일 상하이 푸둥(浦東)에서 태어났다. 보름달이 어찌나 밝았던지 부모는 ‘웨셩(月生)’이라는 아명(兒名)을 지어 줬다. 그리고 3년 후 세상을 떠났다. 큰누나 집에 얹혀살며 눈칫밥을 먹었다. 사숙을 다녔지만 매형의 반대로 3개월에 그쳤고 결국은 매형에게 쫓겨났다. 처남을 쫓아낸 날 밤 매형은 잠결에 똥바가지 세례를 받았다.

상하이에 나온 두웨셩은 부두와 다리 밑을 전전했다. 낚싯대로 행인들의 모자를 낚아채 팔면 허기를 채울 수 있었다. 청방에도 가입했다. 과일가게 종업원으로 취직했지만 번번이 쫓겨났다. 새벽마다 낡은 부대 자루를 들고 부두에 나가 외지에서 과일을 싣고 온 배들 사이를 분주하게 오갔다. 낮에는 좌판을 벌이고 황혼이 되면 찻집, 오락장, 아편굴, 도박장을 돌아다니며 팔았다. 단골 중에 기녀와 댄서들이 많았다. 과일 깎는 솜씨 하나는 예술에 가까웠지만 후일 상하이의 낮과 밤을 지배할 기미라고는 어느 구석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계속)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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