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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진 사림에 탄핵·언론권 주며 시대의 금기와 맞서다

중앙선데이

입력

"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역사는 모든 시대적 금기가 언젠가는 깨진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시대의 금기는 혼자만의 단독행동으로 깨지는 것이 아니라 그 금기를 대체할 새로운 사상과 이를 실천할 조직이 등장해 깨트린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세조 시대에 만들어진 시대적 금기에 도전하는 세력이 재야에서 성장하고 있었다. 사림이라 불리는 신진 정치세력이었다.

예림서원 김종직은 훈구 공신들에 맞서는 사림이란 신진 정치세력을 최초로 형성했다. 김종직을 배향하고 있는 예림서원. 경남 밀양에 있다. 사진가 권태균

절반의 성공 성종④ 홍문관 설치

성종 6년(1475) 11월 승정원에 붙은 익명의 벽서 사건으로 이듬해 초 대왕대비 윤씨가 물러나고 성종의 친정이 시작되었지만 왕권은 아직 미약했다. 권력은 계유정난(1453)부터 시작해 성종 친정 때까지 장장 23년간에 걸쳐 형성된 공신 집단이 장악하고 있었다. 공신 집단은 정치권력뿐만 아니라 경제력도 막강했다. 세조가 공신들에게 준 대납권(代納權: 세금을 대신 납부해주고 두 배 이상을 받는 권리)이 막대한 재산을 축적하게 만들었다. 어떠한 불법을 범해도 처벌 받지 않는 면죄부까지 갖고 있는 공신들은 공신전(功臣田), 별사전(別賜田: 공신에게 내려준 토지), 과전(科田: 관원에게 내려준 토지) 등에서 규정 이상의 막대한 전세(田稅)를 받아 치부했다. 백성들의 생활은 곤궁해질 수밖에 없었고 많은 물의가 일었다.

급기야 세금 담당부서인 호조에서는 성종 6년(1475) 11월 사헌부에 이를 막을 수사권을 주자고 제안하기에 이르렀다.

남효온의 육신전 현덕왕후 권씨의 복위를 주장했던 남효온은 훗날 『육신전』을 써서 상왕복위기도 사건이 정당하다고 역설했던 생육신의 한 사람이다.


“전주(田主: 땅주인)가 전세(田稅)를 거둘 때 함부로 거두는 자가 있으면 전부(佃夫: 경작자)가 사헌부에 고소할 수 있으나 초야(草野)의 백성들이 어찌 일일이 고소할 수 있겠습니까? 이 때문에 마음대로 거두는 자가 많으니 분경(奔競)의 경우처럼 사헌부에 무시로 적발해 범법자는 법에 의거해 처벌하도록 하소서.(『성종실록』 6년 11월 1일)”

불법으로 더 많은 전세를 빼앗긴 백성들은 사헌부에 고소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공신들을 상대로 시골 백성이 서울의 사헌부까지 올라와 고소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성종은 이 문제를 원상에게 의논하라고 시켰다. 원상 한명회·정창손은 그런 사례가 있다는 사실은 인정했으나 기득권을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이같이 탐욕스러운 자는 얼마 안 됩니다. 지금 전지(田地)가 있어서 수세(收稅)하는 자는 대개 대신들입니다. 그들이 함부로 거둔다고 의심하여 사헌부의 대졸(臺卒: 하급관리)들에게 규찰하게 한다면 전부(佃夫)를 침해하는 것보다 더 큰 폐단이 될 것 같습니다. 청컨대 (앞으로도) 전부로 하여금 사헌부에 고발하게 하여 그 전지(田地)를 빼앗고 무거운 벌로 다스리도록 하소서.(『성종실록』 6년 11월 1일)”

앞으로도 계속 규정 이상의 전세를 강탈하겠다는 주장에 다름 아니었지만 성종은 원상들의 의견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 직후 친정이 시작되어 대비 윤씨의 수렴청정은 끝났지만 원상제는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다. 원상제는 왕권을 강하게 제약했지만 누구도 이 문제를 거론하기를 꺼려 했다. 드디어 성종 7년(1476) 5월 15일 대사헌 윤계겸(尹繼謙) 등은 시무책 9개조를 올려 원상제를 정면에서 거론했다.

“원상제도는 조종조(祖宗朝)에는 없던 것으로서 세조 때 일시적인 권의(權宜: 임시적인 필요성)에서 나온 것이지 영구토록 지속할 제도는 못 되는 것입니다…삼가 바라건대 빨리 원상을 파하시어 관직을 서로 침노하는 폐단을 제거하고, 대신을 예의로 대접하는 도리를 펴게 하소서.(『성종실록』 7년 5월 15일)”

윤계겸은 그러나 같은 상소에서 의정부 서사제(署事制)의 부활도 요구했다. 원상제 폐지와 맞바꾸자는 절충안이었다. 의정부 서사제는 의정부에서 집행부서인 육조(六曹)의 보고를 받아 먼저 심사하고 국왕에게 보고하는 반면 그때까지 시행하던 육조(六曹) 직계제는 육조에서 국왕에게 직접 보고하는 체제였다. 의정부 서사제는 의정부 정승들이 육조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제도였다. 원상들은 성종이 원상제를 폐지하는 대신 의정부 서사제를 부활시키는 절충안을 택할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성종의 생각은 달랐다.

현릉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있다. 세조는 단종의 어머니인 현덕왕후 권씨의 친척들이 상왕복위기도 사건에 가담하자 무덤을 파헤쳤다.

“의정부 서사제는 복설(復設)하기 어려운 것이다. 원상제 폐지는 앞에서도 말한 자가 많았고, 또 예로 대신을 대접하는 도리에도 어긋나므로 부득이해서 따르겠다.”
의정부 서사제는 부활시키지 않고 원상제만 폐지하겠다는 것이었다. 이제 성종이 허수아비 왕 노릇에 만족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명백해졌다. 그러나 성종은 아직 왕권이 공신들과 맞설 상황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성종은 훈구 공신세력을 견제할 수 있는 신진 정치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재위 9년(1478) 설치한 기관이 홍문관(弘文館)이다. 『경국대전(經國大典)』은 홍문관이 궁중의 서적을 관리하고 문한(文翰)을 처리하며, 국왕의 자문 기능을 한다고 규정하고 있는데 사실상 세조 때 폐지된 집현전의 부활이었다.

홍문관은 사헌부·사간원과 함께 삼사(三司)로 불렸는데, 탄핵권과 언론권을 갖고 있는 언관(言官)이었다. 성종은 재야 사림(士林) 출신의 과거급제자들을 주로 삼사에 배치해 공신들을 견제했다. 조선 후기 연암 박지원(朴趾源)은 『연암집(燕巖集)』에서 “학문을 강론하고 도(道)를 논하는 사람들을 사림이라 한다”라고 정의한 것처럼 학문하는 선비를 뜻했다.

그러나 조선 초기의 태조~세종실록 등에 ‘사림에서 애석하게 여겼다(士林惜之)’ ‘사림이 비루하게 여겼다(士林鄙之)’ 같은 표현이 나오는 것처럼 ‘학문하는 재야의 양반 사대부’란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들은 세조 때 등장한 부패한 훈구(勳舊) 공신 세력과 자신들을 구별할 필요를 느꼈다. 그래서 성종 무렵 사림은 훈구 공신에 반대하는 신진 정치세력을 뜻하는 정치적 용어로 바뀌게 되었다.

그런 정치적 사림의 선구 격이 점필재(<4F54>畢齋)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이다. 김종직은 성종 8년(1477) 과거에 응시하러 서울로 올라가는 자신의 문인(門人)들에게 ‘우리 당에는 뛰어난 선비가 많다(自多吾黨多奇士)’고 말한 것처럼 자주 ‘우리 당[吾黨]’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함양군수 시절 경내 누각에 걸린 유자광의 친필 액자를 불살라버렸다고도 전해지는 김종직은 사림의 초대 당수였다. 하지만 세조 2년(1456) 회시(會試)에서 낙방했다가 세조 5년(1459) 식년문과에 급제해 세조 때 벼슬을 했다. 그 점 때문에 훗날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지어 수양대군이 단종을 죽인 것을 비판했을 때 비판할 자격이 있느냐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사림이 훈구 공신들과 대립한 것은 순수한 학문적 세계관의 발로만은 아니었다. 양자는 토지를 두고 격렬하게 충돌했다. 사림들은 지방에 상당한 규모의 토지와 노비를 갖고 있는 재지사족(在地士族)이었는데 훈구 세력이 지방까지 세력을 확장하면서 양자가 충돌했던 것이다. 성종 23년(1492) 2월 사림들이 고향에 돌아간 김종직을 위해 “집안에 한 섬의 저축도 없다”며 특별히 늠록(<5EE9>祿: 관리의 녹봉)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자 대사헌 김려석(金礪石)은 “김종직은 경상도 세 고을에 노비[臧獲]와 전장(田莊)이 있는데, 집안에 한 섬의 저축도 없다고 일컫는 것이 옳겠습니까?”라고 반박했다. 김려석이 말한 경상도 세 읍은 김종직의 고향인 선산과 어머니의 고향인 밀양, 처의 고향인 금산을 지칭한 것이었다.

김종직뿐만 아니라 정여창·김굉필 등도 대부분 농장과 노비를 가진 재지사족들이었다. 이처럼 사림도 조선의 지배층이자 지주였다. 토지를 둘러싼 싸움도 양자 사이의 정치적 대립의 중요한 배경이었다. 드디어 성종 9년(1478) 4월 양측이 충돌했다. 흙비[土雨]가 내리자 성종은 널리 구언(求言: 난국을 타개할 의견을 구하는 것)했는데, 사육신의 전기인 『육신전(六臣傳)』의 저자가 되는 유학(幼學) 남효온(南孝溫)이 응지(應旨) 상소를 올려 여러 방안을 건의했다. 그중에 “하늘에 계시는 문종의 영(靈)이 홀로 제사를 받기를 즐겨 하시겠습니까?”라면서 ‘소릉(昭陵) 추복(追復)’을 주장해 큰 파문을 불러일으켰다. 소릉은 단종의 모후 권씨의 능인데 파헤친 장본인이 세조라는 점에서 시대의 금기를 거론한 것이었다.

당연히 훈구 세력들이 발끈했다. 도승지 임사홍이 ‘신자(臣子)로서 의논할 수 없는 일’이라고 나섰고 심지어 국문하자는 주장까지 나왔다. 구언에 응한 응지상소는 처벌하지 않는 것이 관례인데 이를 깨자는 주장이었다. 성종이 응지상소는 처벌하지 않는다며 처벌에 반대하자 한명회까지 나서 국문을 주장했다.

그러나 성종은 갓 성장하고 있는 사림의 싹을 잘라 조정을 훈구 공신 일색으로 만들 생각이 없었기에 “구언(求言)하고서 또 국문하는 것이 옳겠는가?”라고 반대했다. 생육신인 김시습은 남효온에게 ‘자네는 나와 다르다’면서 과거 응시를 권했다고 전해진다. 『국조보감(國朝寶鑑)』은 남효온이 이 상소를 올려 자신의 출처(出處)를 점쳤는데 소릉 복위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이때부터 다시는 과거에 응시하지 않고 방랑하다가 생을 마쳤다”라고 전하고 있다. 소릉 복위는 무산되었지만 무소불위의 공신 세력에 정면에서 맞설 수 있는 신진 정치세력이 등장하고 있음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이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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