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문화] TV 켤것인가 말것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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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춘추시대때 위나라의 영공(靈公)이 진나라로 가던 중 복수강변에 이르자 신기하고 멋진 음악이 들려왔다.

영공은 수행중인 악사에게 그 음악을 듣고 베껴두도록 시켰다.진나라에 도착한 영공은 평공 앞에서 그 음악을 연주하도록 시킨 다음 오는 도중에 배운 새로운 음악이라고 자랑했다.당시 진나라에는 사광(師曠)이라는 유명한 악사가 있었는데 연락을 받고 급히 입궐하였다.

음악을 듣던 사광은 깜짝 놀래며 황급히 연주를 말린 후 이렇게 말했다."이것은 새로운 음악이 아니라 망국(亡國)의 음악이요."

깜짝 놀란 영공과 평공에게 사광은 이렇게 그 이유를 설명했다."옛날 은나라에는 사연(師延)이란 악사가 있었습니다.

당시 폭군 주왕은 사연이 만든 신성백리라는 음악에 도취하여 주지육림 속에서 쾌락에 빠져 있다가 결국 주나라의 무왕에게 주벌 당하고 말았습니다.그러자 사연은 그 악기를 안고 복수에 투신자살했는데 그 후 강가에서는 누구나 그 음악을 들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망국의 음악'이라고 무서워하며 그곳을 지날 때마다 귀를 막는 것을 철칙으로 삼고 있습니다.지금 연주한 음악이 바로 그 음악인 것입니다."

현대에 있어 TV처럼 폭발적인 영향력을 지닌 매체는 없을 것이다.어떤 의미에서 스위치하나만 누르면 전 세계를 파괴시켜버릴 수 있는 핵무기보다도 TV가 더 무시무시한 파괴력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핵무기의 버튼은 어떤 사람이 발작적인 광기로 눌렀다고 해도 여러 사람이 동시에 누르지 않으면 발사되지 않도록 안전장치가 몇 겹으로 장치되어 있기 때문인 것이다.그에 비하면 TV의 버튼은 지극히 단순하다.

세살 먹은 아이라 할지라도 버튼만 누르면 알라딘 램프 속에서 거인이 흘러나와 주인의 명령이면 무엇이든 들어주듯이 시청자의 소원이면 무엇이든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그리하여 수천만명의 시청자들을 한자리에서 동시에 동일한 메시지를 지극히 찰나적인 한순간에 가장 강력한 방법으로 세뇌시킴으로써 마치 조지오웰이 쓴 '1984년'에 나오는 빅브라더(大兄)의 부활을 연상케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TV가 요즘 무엇을 하고 있는가.특히 상업방송을 기치로 출범한 제3의 채널이 생긴 이래로 지난 10년 동안 TV는 경쟁적으로 시청자들을 사로잡기 위해서라면 그 무슨 방법이든 가리지 않겠다는 무차별적 선정주의로 치닫게 되었다.

주로 일본의 경박하기 이를데없는 집단 MC들의 쇼 무대를 그대로 직수입해 들여온 방송들은 또다시 출연자들의 행동에 일일이 자막을 달아 이들을 만화의 주인공으로 희화화하고 있다.그리하여 TV는 연예인의,연예인을 위한,연예인에 의한 거대한 쇼 무대로 전락하고 말았으며 시청자들은 그들끼리 나와서 까불며,말장난하며,놀고있는 장면을 훔쳐보게 되었다.

가수들은 자신의 노래를 선전하기 위해서 수십억의 돈을 들여 촬영을 하는 상상할 수 없는 소비의 극치를 달리고 있으며,또한 그 가수가 몇 천명의 관객을 끌어들일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게임하나로 그 막강한 주말의 황금시간을 30분이나 허비하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든 살아 남아야한다는 절박한 생존게임의 법칙은 전출연자들을 보이지 않는 강박관념으로 사로잡아 모두 남보다 돋보이기 위해서 튀고,과장을 하고,쌍소리를 남발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TV에 나오고 있는 사람들은 대통령이건,정치가건,학자건,성직자건 그 누구든 제3의 눈인 TV카메라에 보여지는 나,즉 진짜의 나가 아닌 가짜의 나에 매달려 전 국민들은 가짜의,가짜에 의한,가짜를 위한 어릿광대로 전락해버리고만 것이다.

그렇다.오늘날 TV속에서는 사연이 만든'신성백리(新聲百里)'의 현란한 음악과 사치스럽고 달콤한 망국의 목소리들이 여전히 흘러나오고 있다.마치 로렐라이의 언덕 위에서 노래부르는 요정의 매혹적인 선율처럼.

그 노래 소리에 도취되어 바라보고 있는 동안에 배는 물결에 휩쓸려 암초에 부딪쳐 난파되어 침몰하듯 우리는 지금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 것일까.옛사람들처럼 귀를 막을 것인가.아니면 TV화면을 끌 것인가.그것이 문제로다.

최인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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