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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커비전] 히딩크호서 활짝 피는 고종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2면

히딩크가 대표팀을 맡은 후 벌인 두차례 경기를 통해 팬들에게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긴 선수는 고종수다.

그에 대한 평가는 항상 극과 극을 달렸다. 팬들은 1970~80년대 컴퓨터 링커인 조광래 이후 한국 축구의 미드필드를 이끌 천재로 치켜세운다.

반면 일부 감독들은 "팀 분위기를 해치고 요령을 피우는 골치 아픈 선수" 라고 평가했다.

99년 9월 7일 일본 도쿄(東京)에서 한.일전이 열렸다. 일본은 이탈리아에서 활약하는 나카타를 6일 전 합류시키는 등 결의가 대단했다.

반면 한국은 최고 테크니션으로 꼽히던 고종수를 제외했다. 경기 결과는 1 - 4로 한국의 참패였다.

당시 고종수는 왜 탈락했을까. 같은 해 6월 19일 서울 잠실 올림픽 주경기장. 크로아티아와 사실상 코리아컵 결승전을 앞둔 한국팀의 라커룸에서 허정무 감독을 만났다.

허감독은 작전 구상에 앞서 인상을 쓰며 한 선수를 힐난하고 있었다. "정신나간 거 아냐. 시합에 나가는 애가 유니폼을 가져 오지도 않고. 한심해 죽겠어" 라며 노기에 찬 목소리를 쏟아냈다.

고종수는 다음날 해단식에 불참해 허감독을 더욱 불쾌하게 만들었다.

고종수는 청소년 대표 시절에는 박이천 감독과의 악연이 있었다.

운동장에서 감독 노릇을 한다는 불경죄에 걸려 97년 말레이시아 쿠칭에서 열렸던 세계청소년대회에 출전하지 못하고 보따리를 쌌다.

이때 붙은 별명이 바로 '대학 4학년' 이었다. 고등학교를 막 졸업한 어린 선수임에도 불구하고 나이에 걸맞지 않은 대담성과 카리스마로 선수들을 휘어잡는 솜씨 때문에 생긴 별명이다.

98년 프랑스 월드컵 대표 시절 차범근 감독도 역시 톡톡 튀는 강한 개성의 고종수 문제로 골머리를 앓았다.

여수 구봉중을 졸업한 고종수는 광주 금호고로 진학을 결정했으나 우수 선수는 다른 시 전출 금지라는 학군 문제로 순천고에 일반학생으로 입학했다가 뒤늦게 전학했다.

당시 금호고 기영옥 감독은 "죽어도 금호고에서 축구를 하겠다" 는 비쩍 마른 선수를 테스트한 순간, 그의 천재성에 탄복해 편법을 동원해 그를 수중에 넣었다.

1학년 때 전국시.도대항대회에서 득점상, 고2 때 백록기에서 팀을 우승으로 이끌며 최우수상을 타며 고종수라는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

96년 고교 졸업 후 고종수는 스타들이 즐비한 수원 삼성에 입단해 선배들을 제치고 주전으로 활약했다.

안정환.이동국과 더불어 프로축구 트로이카 시대를 활짝 열며 여고생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신세대 스타로 부상했다. 그후 고종수는 천재 혹은 악동으로 평가받으며 부침이 계속되는 선수생활을 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그를 탈출시킨 것은 조광래 감독이었다. 조감독은 올해 일본에서 열렸던 세계 올스타와 한.일 혼성팀간의 경기에 주전으로 기용했고 그림같은 프리킥 골을 성공시키는 기회를 제공했다.

이 골은 고종수에게 자신감을 갖게 했고 이 여세를 몰아 특유의 개인기와 개성을 바탕으로 히딩크 감독의 전술을 가장 완벽히 소화한다는 평가를 받게 됐다.

고종수가 오랜 방황과 방랑을 마치고 정착해 2002년 월드컵에서 골을 터뜨린 뒤 특유의 골 세리머니인 '뒤로 공중돌기' 하는 모습을 보여 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축구해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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