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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션 와이드] 이엉으로 전통을 잇는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7면

현대화의 거센 물결 속에서 우리의 전통을 제대로 간직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국가 중요 민속자료인 충남 아산 외암리 민속마을, 강원도 고성 왕곡마을, 경북 안동 하회마을.경주 양동마을, 전남 승주 낙안읍성 민속마을, 제주 성읍마을이 그런 곳들이다.

이중 외암리 민속마을은 기와집과 초가 등 전통 가옥이 가장 잘 보존돼 있다는 평가를 받고있다. 전통을 지키고 있는 마을과 주민들의 모습을 살펴본다.

가을걷이를 끝낸 대부분의 농민들은 여유를 갖고 농한기(農閑期)를 즐긴다.

겨울밤 가족끼리 모여 앉아 사랑방 한 켠에 쌓아 둔 가마니 속의 고구마를 꺼내 깎아 먹는 모습은 정겹기 그지없다.

마을회관이나 노인정에는 장기나 바둑을 두면서 기나긴 겨울의 무료함을 달래는 동네 어른들의 왁자지껄함으로 가득하다.

그러나 충남 아산시 송악면 외암리 1구 주민들은 가을걷이가 끝나면 곧바로 대사(大事)를 처리해야 한다.

마을 주민 전원이 참여하는 지붕 개량(改良)사업이 그것이다. 하지만 새마을 운동 때처럼 초가집을 헐고 슬레이트를 올리는 작업을 떠올리면 오산이다.

이 마을 65가구(2백80명 거주)가운데 50가구(77%)는 초가집이다.

나머지 15가구만 기와집. 마을 전체가 국가지정 중요민속자료(236호)로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 촬영 세트장에 온 느낌이다.

주민들은 1년에 한번씩 지붕의 짚을 걷어내고 새 옷을 입힌다. 1년 이상되면 짚이 썩어 집을 보존하는 데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다. 좀 낡은 집은 방안에 물이 스며들기도 한다.

지붕을 새로 입히는 일은 간단치 않다. 우선 인부를 구하기가 어렵다. 이엉을 잇는 능력을 가진 '기술자' 가 드물기 때문이다. 기술자들도 그나마 노동력이 떨어지는 노인들이다. 비용(평당 5만5천원)의 90%는 국가에서 지급해 준다. 나머지는 주민 부담이다.

이 마을 주민들은 추수가 끝난 뒤 마을 전체에 필요한 짚을 공동으로 구입한다.

마을 전체 초가집 이엉잇기에 필요한 짚은 4백여 마지기(8만평)분. 아산에서 생산되는 물량 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어 천안.예산 등 인근 지역에서 사온다.

이엉잇기에는 송악면 전역의 노인 기술자 50명이 총 동원된다. 외암리 주민 이외의 기술자는 일당(5만원)을 받고 일한다.

30평 규모의 초가집 1가구의 이엉을 엮는 데 20~30명이 공동 작업하면 보통 1~2일 걸린다. 따라서 마을 모든 집의 이엉을 엮으려면 두 달은 족히 걸린다.

주민 박진현(41)씨는 "전통을 잇는다는 생각으로 이엉을 잇지만 갈수록 바빠지는 농촌에서 해마다 지붕을 갈아 입히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라고 말했다.

이에 비하면 기와집 주인들은 행복한 편이다. 기와가 깨지면 필요한 부분만 갈아 끼우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마을 전체가 나즈막한 돌담(5㎞)으로 이어지다시피한 외암마을은 17세기에 제모습을 갖췄다.

조선 명종 때 장사랑(將仕郞)벼슬을 지냈던 이정(李珽)선생이 이곳에 정착한 뒤 예안 이씨(李氏)집성촌으로 자리매김했다.

이정 선생의 6대손인 외암(巍巖)이간(李柬.1677~1727)선생이 이조참판을 지내는 등 이름을 떨치자 마을주민들이 그의 호를 따 외암마을로 부르기 시작했다. 6.25 전쟁 이후에 신.박.최씨 등 여러 성씨가 모여 들었다.

1988년 국가지정 전통건조물 보존지구(제2호)로 지정됐다가 지난해 1월 국가지정 중요민속자료로 승격, 지정됐다.

이 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집은 이석선(87.여)씨의 집(초가)으로 기둥인 밤나무는 2백년 이상 됐다.

지은지 최소한 2백년은 됐다는 이야기다. 가장 큰 집(70여평)의 주인은 이간 선생의 8대(代)손인 득선(得善.60)씨 소유다. 이 집(중요 민속자료 195호)은 고종황제가 하사한 것이다.

나머지 집들도 평균 1백년 이상은 됐다.

외암민속마을 주민들은 대부분 논농사를 짓는다. 7~8년 전만 해도 산에서 나무를 해다 땔감으로 사용했다. 3년 전 사랑방을 제외하고는 아궁이를 없앴다. 산림보호를 위해서다. 지금은 기름이나 심야 전기보일러를 사용하고 있다. 초가집에 어울리지 않는 보일러 시설을 갖춰놓고 있다.

전통마을로 지정된 뒤 주민들이 겪는 불편은 만만찮다. 집 수리도 마음대로 못하고 농기계 보관창고조차 지을 수 없다.

마을 이장 신동주(申銅周.53)씨는 "마을 전체가 민속자료이기 때문에 일상 생활에 규제가 심하다" 며 "융통성있는 관리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고 말했다.

아산=김방현 기자.사진=김형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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