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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일기] 일본에 남긴 '이수현 흔적'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죽음으로 후세에 커다란 흔적을 남기기란 쉽지 않다.

특히 외국인이 그러하기란 더욱 어렵다.

그러나 재일 한국유학생 이수현(李秀賢.27.고려대 무역학과 4년 휴학)씨의 '의로운 죽음' 이 일본 사회에 몰고 온 충격과 감동은 한국에선 상상하기 힘들 정도다.

요미우리(讀賣).아사히(朝日).마이니치(每日)신문 등 일본 유력언론들이 연일 李씨 이야기를 사회면 톱기사 등으로 비중있게 보도하고 있다.

李씨를 모르는 일본인들의 성금.격려전화가 잇따르고 있고 모리 요시로(森喜朗)일본 총리가 29일 李씨의 빈소를 방문해 분향하기도 했다.

사고 당시 일본인 세키네 시로(關根史郞.47)도 취객을 구하려다 李씨와 함께 사망했다.

그러나 세키네는 李씨에 비해 상당히 작게 다뤄지고 있다.

일본 사회에서는 급속도로 확산되는 젊은이들의 이기주의.개인주의에 대한 우려가 많다.

지하철.버스 안에서 노인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경珥?극히 드물다.

이럴 때 27세의 청년, 그것도 증조할아버지(일본에서 사망).할아버지(일제 때 탄광 징용).아버지(오사카 출생) 등 3대에 걸친 '악연' (惡緣)으로 얽매인 한국 청년이 전혀 모르는 일본인을 위해 살신성인(殺身成仁)했다는 점에 일본 사회가 엄청난 감동을 받은 것이다.

모리 총리도 "李씨의 죽음이 일본 젊은이들에게 모범이 되도록 하고 싶다" 고 말했다.

21세기 벽두에 발생한 이번 사건은 일본 사회의 한국인에 대한 인식을 한층 높이는 데 큰 기여를 할 것으로 보인다.

일본에서는 지난해부터 한국인에 대한 우호여론이 높아지고 있지만 아직도 껄끄러운 감정이 상당히 남아 있고 재일 한국인을 낮춰보는 시각도 적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게다가 최근에는 2002년 월드컵 명칭 문제를 놓고 양국이 갈등하고 있다.

그러나 李씨의 죽음으로 한국인을 새롭게 보는 눈길이 늘고 있다.

양국 국민들 사이에 서로 우호적인 감정이 많아지면 국가 관계도 자연히 좋아지게 마련이다.

李씨는 이국땅에서 한 줌의 재가 돼 귀국하지만 그의 흔적은 일본에 오래 남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의로운 행동이 한국과 일본의 실질적인 관계 개선으로 이어지기를 기대해 본다.

오대영 도쿄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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