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 리포트] 실버·베이비붐 세대 색소폰을 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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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문건식(67·왼쪽)씨가 현대백화점 문화센터에서 색소폰을 불고 있다. 그는 5년째 이곳에서 악기 연주를 배운다. 김무균 강사(오른쪽 끝)는 “중년층 사이에서 색소폰 강좌 인기가 높다”고 말했다. [강정현 기자]

‘아저씨’는 한 시간 동안 자리에 앉지 않았다.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를 때까지 색소폰을 불었다. 세게 부느라 숨이 달릴 때면 허리를 뒤로 꺾기도 했다. 문건식(67)씨는 “회사를 그만두고 색소폰을 배우기 시작한 지 5년쯤 됐다”며 “여기서 만난 친구들과 함께 탑골공원에서 공연하는 게 꿈”이라고 말했다.

21일 오후 5시 서울 삼성동 현대 무역센터점 문화센터. 9명의 수강생 전원이 참석한 가운데 ‘일요 색소폰 스쿨’ 강의가 시작됐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장년층이 대부분이었다. 오늘의 연습곡은 ‘당신도 울고 있네요’. 김무균 강사는 오래된 친구처럼 말을 꺼냈다.

“잘들 오셨어. 오늘은 51쪽 연습 한 번 해볼까요. 건식씨는 52쪽 펴놓고 계시면 어떡해요.(웃음)”

강사가 한 소절 불고, 수강생은 따라 부는 연습이 계속됐다. 강사에게 결석하는 사람은 없느냐고 물었다. 그는 “결석은커녕 수업시간보다 먼저 나와서 연습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빈 강의실로 들어가 봤다. 고순영(66)씨가 박자에 맞춰 발을 구르며 색소폰을 불고 있었다. 그는 “수업 시작하기 한 시간 전부터 빈 강의실에서 연습하고 있었다”며 “주말에 나와 악기를 배우는 이 시간이 인생의 낙”이라고 말했다. 2008년 3월부터 색소폰을 배우기 시작한 김인서(61)씨는 “골프·수영도 취미로 즐겼지만 좀 더 고급스러운 취미 생활을 즐기고 싶어 악기에 빠졌다”며 “지난해 은퇴한 후 틈만 나면 한강변에 나가 연습을 한다. ‘악기가 얼마냐’ ‘어디서 배울 수 있느냐’고 묻는 동년배를 보며 악기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는 것을 실감한다”고 말했다.

은퇴하거나 은퇴를 앞둔 실버 세대와 ‘베이비붐’ 세대(1955~63년생)가 악기 연주에 빠져들고 있다. 이들이 은퇴 시기를 맞아 취미 생활로 악기 연주를 택하고 있는 것이다. 94년 처음 개설한 이 백화점 문화센터의 색소폰 강좌는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신규 수강생이 많지 않았다. 당시 초급 강좌는 없었다. 어느 정도 색소폰을 다룰 줄 아는 사람들이 강좌를 들었기 때문에 중·고급반만 개설했던 것. 그 뒤 중장년층 초보자들의 강좌 문의가 늘면서 2005년 초급반도 문을 열었다. 백성혜 문화센터장은 “2000년 200여 명이었던 색소폰 강좌 수강생이 지난해 450여 명으로 늘었다” 고 말했다.

덩달아 악기 매출도 늘었다. 그동안 피아노를 비롯한 악기류는 백화점에서 ‘구색형’ 상품이었다. 매출을 높이는 효자 상품이라기보다 ‘우리도 이런 제품을 판다’고 알리기 위해 진열하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요즘은 달라졌다. 현대백화점의 악기 매출은 2007년 전년보다 3% 줄었으나 지난해는 7% 증가로 돌아섰다. 주로 50~60대 연령층의 고객이 악기를 찾는다는 게 백화점 측의 설명.

아이파크백화점 악기 전문매장의 1월 매출도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30% 증가했다. 중장년층에게 인기가 높은 색소폰·클래식 피아노 등 전통악기 매출이 45%나 늘었다. 이성원 삼익악기 일반악기팀장은 “지난 10년 동안 실버 세대를 위해 내놓은 소형 관악기 매출이 3~4배 증가했다”고 말했다. 정지영 현대백화점 마케팅팀장은 “베이비붐 세대에게 피아노 등 악기는 어린 시절 부(富)의 상징이었다”며 “시간·구매력을 갖춘 이들이 은퇴하면서 본격적으로 악기 구매에 나선 것으로 분석된다”고 말했다.

이런 추세라면 악기에 몰입하는 사람들은 점점 더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삼성경제연구소에 따르면 올해부터 2018년까지 133만 명의 봉급생활자들이 정년을 맞아 은퇴할 전망이다. 은퇴 후 특별한 취미 없이 ‘제2의 인생’을 살던 이전 세대와 달리 지금은 여가 선택의 폭이 넓어졌다. 이동훈 수석연구원은 “골프·요트·승마·클래식 음악 등 고급 여가문화에 대한 수요가 꾸준히 늘고 있다”며 “사회가 고령화·다원화될수록 이런 경향은 가속화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삼성경제연구소는 올해 10대 국내 트렌드에 ‘본격화된 베이비붐 세대의 은퇴’와 ‘여가문화의 친환경·고급화’를 포함했다.

글=김기환 기자
사진=강정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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