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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한은 총재를 뽑는 분, 하려는 분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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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법에도 적어뒀듯이 한은 총재는 전문성만으로 되는 자리가 아니다. 각별한 소양과 품성이 요구된다. ‘스트라이크 존’이 매우 좁은 자리다. 뽑는 사람도, 되려는 사람도 고민을 많이 해야 하는 자리다.

그 요건에 맞춰 요즘 새 총재 후보자들이 거론되고 있다. 그에 따라 누군 이래서 곤란하고, 또 누구는 저래서 어렵다는 견제성 하마평도 나온다. 이럴 때 언론이 누구를 뽑으라고 할 수는 없다. 다만 이런 스타일은 재고해야 하지 않겠나, 하는 의견을 제시할 따름이다.

가장 위험해 보이는 사례가 다음 자리에 의욕을 보이는 분이다. 한은 총재직을 발판으로 장관이나 국무총리, 아니면 더 큰 꿈을 키우는 분들이다. ‘레버리지형’이라고나 할까. 그런데 한은 총재는 정부와 의견을 달리해야 할 때도 있는 법이다. 이럴 때 꿈이 너무 원대하면 다음 자리가 눈에 밟혀 중심 잡기가 어려워진다.

총재를 꼭 하고야 말겠다고 벼르는 ‘한풀이형’도 위험해 보인다. 한은 총재가 된다는 것, 가문의 영광이자 족보에 굵은 획을 그을 만한 일이다. 이런 분들에겐 총재가 되는 게 중요하지, 총재직을 어떻게 수행할 것인지에 대한 비전이 잘 안 보인다.

중앙은행의 독립성에 매몰돼 있는 분도 곤란하긴 마찬가지다. 한은 독립을 위해 장렬히 산화하겠다는 ‘강골형’이다. 하지만 한은은 투쟁하는 곳이 아니다. 정부와는 물론 모든 경제주체와 소통하면서 시장을 조율해야 한다. 골수 한은맨들에겐 소신파로 보이겠지만, 경제주체들에겐 불안감을 준다.

이것저것 다 해봤으니, 마지막으로 한은 총재직을 화룡점정(畵龍點睛)으로 삼겠다는 분도 있다. 억세게 관운이 좋아 공직을 무슨 트로피처럼 주렁주렁 모은 분들이다. 그동안 쌓은 경륜을 총재직에서 활용한다는 점에서 좋게 볼 수도 있다. 다만 이런 경륜은 시장이 먼저 널리 평가해 주고, 이게 인사권자의 시야에 들어 낙점으로 이어져야 자연스럽다. 자가발전이 너무 심하면 염치가 없어 보인다.

이런 분들을 거르는 건 전적으로 인사권자의 몫이다. 요즘 대세로 기울고 있는 인사 청문회도 100% 믿을 건 못 된다. 청문회를 통해 훌륭한 인물을 선임해야 한다는 취지엔 모두 공감한다. 그러나 빠진 게 있다. 주체인 국회가 제대로 된 청문 능력을 갖추고 있느냐다. 싸우고 흠집 내는 데는 도사들이다. 이순신 장군도 통과하지 못할 것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 아닌가. 청문회 도입론 자체가 특정 인사를 겨냥한 것이라는 말도 이 때문에 나온다. 그렇다면 자칫 ‘청문회 프렌들리’한 인물이 어부지리(漁父之利)로 총재가 될 가능성도 있다. 그런 총재에게 무슨 힘과 신뢰감이 실리겠나.

다음 총재는 살펴야 할 게 많다. 무엇보다 정부와 조율을 잘 해야 한다. 출구전략의 시기와 수단의 결정에 있어선 정부의 몫이 더 큰 게 현실이다. 해외 중앙은행들과의 공조도 필요하다. 혼자 나설 수는 없는 분위기다.

더 중요한 고려 대상은 국민이다. 개인부채가 급격히 불어난 상황에서 금리 인상은 누구에게도 환영 받기 어렵다. 그렇다고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놔뒀다 인플레가 일어나면, 그 책임은 죄다 한은에 돌아온다. 참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입장이다. 급할 때는 팔 비틀어 돈 풀라고 하다가, 나중에 그 때문에 문제가 생기면 책임도 지우는 꼴이니 한은은 난감해할 만하다. 그러고서도 결국엔 국민에게 쓴 약을 삼키라고 해야 하니 더욱 난처하다.

이런 민감한 문제를 다뤄야 할 한은 총재에게 필요한 것은 고도의 정치역량이다. 경제주체들의 지지를 이끌어내는 설득력, 상대방을 끌어안는 포용력, 목표를 달성하는 전략·전술, 기민한 결정을 하는 과단성, 저항과 반발을 헤쳐 나가는 돌파력, 공격과 비난을 견뎌내는 담력, 싸워야 할 때 숨지 않는 투쟁성, 그리고 이런 것들이 뭉뚱그려져 우러나오는 카리스마….

한은 총재의 ‘고결한 인격’이란 그 같은 현실적 자질들을 바탕으로 빛을 발해야 하는 거다. 세속과 거리를 둔 고고한 초식성 체질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그래서 더욱 더 어려운 게 한은 총재 자리다. 뽑는 분, 하려는 분, 모두 다시 한번 심사숙고하길 바란다.

남윤호 경제데스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