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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외환·외자·외곬인생 40년 (6)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6면

6. 국제금융대사

1998년 1월 12일 나는 유럽으로 날아갔다.

독일 ·프랑스 ·스위스 등 유럽 은행들의 반응도 냉랭했다.돈 한 푼 안 낸 미국의 투자은행들만 상대하고 우리는 괄시하느냐고 따졌다.

유럽의 한 금융계 인사가 10대 재벌이 부도가 나면 어떻게 할 거냐고 물었다.

나는 “대마불사(大馬不死)는 이제 통하지 않는다”고 답했다.다만 10대 재벌 중에 어디가 그렇다는 얘기냐고 물었다.

“대체 어디가 그럴 것 같다는 말입니까?”(like whom?)

“대우같은 재벌이죠.”(like Daewoo.)

대우그룹 부도에 대한 우려를 처음 접하는 순간이었다.

그 후 구조조정 로드쇼를 하러 홍콩과 싱가포르에 갔을 때도 대우 얘기가 나왔다.질의응답 시간에 한 외국계 투자은행 사람이 대우의 부도 가능성에 관해 물었다.그러자 대우측의 한 인사가 “도대체 무슨 근거로 대우가 망한다고 하느냐”고 항의했다.

1월 초순 첫 채권단 회의에서 도쿄미쓰비시(東京三菱)은행측이 한국 정부를 지원하겠다고 밝혔다.런던에 본사를 두고 있는 홍콩상하이은행은 돈을 빼 가지 않겠다고 선언했다.고마운 일이었다.

다시 97년 12월 28일.

나는 임창렬(林昌烈) 부총리와 조찬을 같이했다.그 자리에서 대만 정부가 우리나라에 1백억 달러를 지원키로 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이를 위해 대만이 “부총리가 대통령 당선자의 편지를 휴대하고 와 달라”고 요청했다는 것이다.

국교 관계가 없는 나라에 현직 부총리를 보내기는 곤란하다고 판단한 YS정부는 나더러 전직 부총리로서 대사 자격으로 대신 가 달라고 했고 곧 외교안보수석으로부터 대사 여권을 만들어 놓았으니 찾아가라는 연락이 왔다.

이듬해 1월 3일 발령을 받은 국제금융대사 자격으로 사용한 여권의 발급일이 97년 12월 27일로 돼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발령도 받기 전 대사 여권부터 받은 것이다.

때마침 김용환(金龍煥) 비상대책위원회 대표가 전화를 걸어 대만측 제의에 관한 내 의견을 물었다.나는 “솔직히 그 제의가 믿기지 않는다”고 답했다.

“정부의 심부름이니 가라면 가겠지만 대만 국내 정치에 이용 당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세상에 영원한 비밀이란 없다.자칫 중국과의 관계가 악화될 수도 있지 않나하는 생각도 들었다.

정부쪽 인사가 “아마 아시아개발은행(ADB)을 통해 돈을 주는 형식이 될 것”이라고 귀띔했다.ADB라면 80년대말 내가 부총재로 있던 기구이다.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아니나 다를까.ADB쪽에 알아 보니 코웃음을 쳤다.대만은 특별 출연을 한 적도 없다는 것이었다.

결국 대만의 한국 지원건은 해프닝으로 끝나고 말았지만,하마터면 국가 망신을 당할 뻔한 사건이었다.

98년 1월 3일 나는 다시 뉴욕으로 향했다. 이 날부터 1년 동안 나는 국제금융대사로 일했다.말이 대사지 일종의 연락관이었다. 백의종군이었다.

1월 5일 오전 시티와 JP모건 주선으로 주요 은행 관계자들과 회의를 한 후 로렌스 서머스 미 재무부 부장관을 만나러 워싱턴으로 날아갔다.오후 5시 30분 서머스는 퇴근을 미루고 기다리고 있었다.

86년 재무장관 시절 원화 절상 문제로 당시 제임스 베이커 재무장관을 만나러 갔을 때 나는 서머스 방에 들른 일이 있었다. 10여년 만에 원화 절하 문제를 다뤄야 하는 입장으로 뒤바뀐 것이다.

악수를 나누자 마자 서머스는 내게 “당장 대외부채 등의 정확한 데이터와 국제금융계 인사들의 좋은 어드바이스가 필요한데 문제는 스피드”라며 나더러 그 날로 귀국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그는 또 한국에서는 증시 얘기들만 하는데 채권시장을 빨리 정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나는 다음 날 아침 캉드쉬 국제통화기금(IMF) 총재를 만나고 서둘러 귀국길에 올랐다.

정인용 前 경제부총리

정리=이필재 이코노미스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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