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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외환·외자·외곬인생 40년 (5)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5면

5. "돈 빼가지 마시오"

YS에게 첫 뉴욕 방문에 대해 보고하고 난 다음 날인 1997년 12월 24일 오후 나는 김만제(金滿堤) 포철 회장과 함께 국회내 국민회의 총재실로 찾아가 DJ에게 같은 내용의 보고를 했다. DJ와의 첫 상면이었다.

그 때까지 나는 그와 악수 한 번 해 본 적이 없었다. 내가 거의 평생을 정부에서 종사했다면 김대중(金大中) 당선자는 한평생 정부 밖에서 정부를 비판한 분이었다. 뉴욕에 머무느라 나는 대통령 선거 때 투표도 못했었다.

외환위기 당시 외채 만기연장 등을 위해 밖에서 뛸 때 외국의 투자은행 사람들이 김 당선자에 관해 물었다.나는 세 가지 얘기를 했다.

"첫째, DJ는 노동계와의 관계가 우호적인 사람이다. 노조가 인정하는 인물인 만큼 새 정부는 노동개혁을 제대로 추진할 것이다. 영국의 노동당 정부가 그랬듯이. 그 점에서 국민들이 적절한 선택을 했다. 둘째, 그는 오랫동안 남북문제를 연구해 온 사람이다. 남북관계에 상당한 진전이 있을 것이다. 셋째, 나라를 이 꼴로 만들어 놓은 정부를 그냥 둔다는 것은 한국국민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50년만의 평화적인 정권 교체라고들 하는데, DJ 당선으로 국민들이 자긍심을 회복하게 됐다."

당시 DJ는 많은 외국인들 사이에 '과격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다.

나중에 외자유치단에 합류한 유종근(柳鍾根) 전라북도 지사의 역할은 이들에게 "DJ는 시장경제론자"라고 PR하는 것이었다.

그 해 12월 21일 첫 뉴욕 방문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나는 도쿄(東京)에 내렸다.

도쿄서도 나는 "한국은 결코 모라토리엄(채무지불 유예)을 선언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이 날 점심은 내가 아시아개발은행(ADB)에 있을 때 ADB 총재를 지낸 후지오카 JCR 이사장이 샀다.

그는 대뜸 다카가키 도쿄미쓰비시(東京三菱)은행장을 만나봤느냐고 물었다. 못 만났다고 하니 그가 즉석에서 전화를 걸어 주었다. 도쿄미쓰비시라면 내가 외환은행에 몸담고 있을 때 모델로 삼았던 은행으로, 일본 은행들 가운데 한국계 은행에 상대적으로 우호적인 은행이었다.

그 날 오후 도쿄미쓰비시은행을 찾아갔다. 안내를 받아 회의실에 들어서니 탁자 건너 편에 20여명의 간부들이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쪽은 나 혼자였다.

"돈은 우리가 많이 넣었는데 왜 미국의 투자은행들로 달려갔느냐"는 등 힐난이 쏟아졌다.

나는 그래서 오늘 내가 오게 됐다고 설명하고,한국에서 돈 빼가는 것을 중단하라고 말했다.

"그렇게 앞다투어 돈을 빼 가면 우리가 어떻게 일본 은행을 믿습니까? 살려 달라고 애걸하는 게 아닙니다. 자선을 베풀라는 게 아니라, 우리 서로 비즈니스를 하자는 겁니다."

그러자 그들이 이구동성으로 한국의 모라토리엄 선언 가능성을 들먹였다. 한국이 일방적으로 모라토리엄을 선언해 버리면 채권에 비례해 돈을 날릴 수밖에 없다는 얘기였다.

"상황이 이런데 일본 은행들을 탓할 수도 없지 않습니까? 더욱이 일본은 요즘 결산기입니다. 일본 나름대로 사정이 있다는 거죠."

"한국은 70년대 오일 쇼크 때도 모라토리엄을 선언하지 않은 나라입니다."

나는 모라토리엄을 할 거라면 굳이 내가 올 이유가 없다고 주장했다. 오일 쇼크 당시 북한은 국가 부도를 냈었다. 오늘날의 남북한간 경제 격차는 이 때 싹튼 것이라고 나는 본다. 모라토리엄이라는 것은 선언하고 나면 10년 이상 그 후유증에 시달리게 마련이다.

정인용 煎 경제부총리

정리=이필재 이코노미스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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